[참고도서] 개념-뿌리들, 이정우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다양한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교실에는 무수한 형태들과 색깔들과 또 다른 무수한 질적 차이들이 있다. 여기 칠판이 있고, 네모난 형태, 녹색이라는 색깔, 촉감, 크기 등 무수히 다양한 질적 차이들이 나타난다. 우리는 풍요로운 질적 차이들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이란 주체가 이 무수히 다양한 것들을 붙잡기 위해 사용하는것이 바로 개념이다. 아무리 경험을 많이 해도 개념을 가지고 그것들을 파악하지 못할 경우, 그 경험들은 어떤 인상이나 희미한 기억이나 순간적인 느낌 같은 것들로 지나가 버린다.

개념이란 극히 미묘하고 유동적이고 모호한 우리의 경험 내용들을 일반화하고 평균화해서 잡아주는 것이며, 나아가 그 내용들의 그 의미를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뽀삐라든가 바둑이라든가 해피, 멍멍이, …라고 불리는 생명체에 관련해 무수한 경험을 한다. 꼬리를 흔드는 모습, 낯선 사람을 보고 짖는 행동,…등. 그런데 그 무수한 경험들을 일반화하고 평균화되었을 때 개라고 하는 개념이 성립하고, 거꾸로 개라고 하는 이 개념을 우리가 하는 경험들에 투사했을 때우리는 수많은 경험들이 정리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RSM] 직접적으로 설명방식에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왜 개념이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아이가 뽀삐를 가르키며 “저건 뭐야?”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그건 개야”하고 대답할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에 대해 “저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어봤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 사물의 종(種)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저것은 무엇인가?”라고 말할 때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그 사물의 본질이다. 그리고 본질을 언어로 정식화 한 것이 정의이다.

[RSM] 아직은 직접적으로 설명방식에서 사용하지는 않고 있지만, 일반화의 설명에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존재는 “존재하다”라는 동사의 뜻, 어떤 존재, 어떤 것이라는 명사적인 뜻, 그리고 본질이라고 하는 뜻, 이렇게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존재로서의 존재, 즉 존재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다.

“있다/이다”라는 말의 여러 가지 뜻

  1. 자체로서의 존재와 이것(자체로서의 존재)에 부대해서 존재하는 존재

철수, 탁자, 서울은 전자의 예이고, 철수의 머리색깔, 표정, 탁자의 모양, 색깔은 후자의 예이다.

타자에 복속되지 않는 것을 실체라고 부르고, 타자에 복속되어 존재하는 것을 맥락에 따라 성질, 속성, 빈위, 술어, … 등으로 부른다.

그래서 전통적인 사유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 바로 실체- 성질 구도, 언어적으로는 주어-술어 구조이다. 그래서 논리학에서는 늘 “S is P”라는 형식을 사용한다. 요컨대 “존재한다”라는 말에는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뜻과 실체에 부대하는 성질로서 존재한다는 뜻 두 가지가 있다.

  1. 진(truth)로서의 존재

“The sky is blue”에서 is

이것이 하나의 판단이 성립되게 해준다. 판단이란 주어에 어떤 술어를 붙이는 행위다. “하늘은 …하다”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이것이 판단의 문제이다.

  1. 잠재태, 현실태

존재는 지금의 현실 이상의 것이다. 내 머리도 하얗게 샐 것이다. 우리가 지금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거대한 잠재태도 존재하는 것이다.

  1. 우연도 일종의 존재이다.

서구 근대 철학은 객체의 철학이 아닌 주체의 철학이다. 즉 인식론 중심의 철학이다.

근대 철학에서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주체에 관계없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식주체의 대상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주체가 표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있는” 것이다. 주체가 표상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거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것이다. 표상이란 바로 세계를, 대상을 내 앞에 불러와 세우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대상이란 바로 인식주체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는 항상 대상이고, 주체가 사유하는 대상이 존재다.

인간에게 인식 가능한 차원은 현상이다. 현상은 인식주체에게 나타난 차원이다. 인식주체에게 나타난(現) 무엇(象)이 현상이다.

20세기 존재론은 “존재에서 생성으로” 나아간다.

실재, 실체, 본질은 단적으로 말해서 존재는 존재인데 그 앞에 ‘참된’이란 형용사가 붙은 것으로 보면 된다.

실체란 일단 정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존재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를 실체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그의 사유를 진전시키는 가운데 근본 실체는 개체가 아니라 형상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바꾼다. 일차적으로 개체들이 실체이지만, 개체들을 다시 분석해 보면 거기에서 질료적인 측면과 형상적인 측면을 구분해 낼 수 있게 된다.

질료에 구현된 형상들을 확인(인식)할 뿐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늘 규정성들, 즉 형상의 구성요소들이지, 질료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실체일 수 없다”는, 인신론과 존재론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명제에 입각해 질료보다는 형상을 근본 실체로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과 “타자에 의존해 존재하는 것”을 구분한다.

[RSM] 직접적으로 설명방식에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객체와 특성의 관계와 인식론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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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뉴테크프라임 대표 김현남입니다. 저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하시는 분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www.umlcert.com/kim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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