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AI Smarteasy 코파일럿 에이전트 – 글 쓰기 – <현역>

1권. <60세 현역, 내 파트너는 AI>

 

[제1화] 시간의 무게

서걱거리는 금속음, 코를 찌르는 절삭유 냄새, 희미하게 섞여드는 쇳가루의 비릿함. 지난 30년간 한기성의 오감을 지배해 온 이 공장이라는 세계는, 오늘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설비 앞에 서서, 막 입고된 신형 부품의 조립 설명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분명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까만 잉크로 선명하게 보였던 글자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약속이라도 한 듯, 쌀알보다 작은 글씨들이 희미한 잔상처럼 번져 보였다.

“……하아.”

결국 그는 말없이 가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30년 넘게 기름밥을 먹으며 단 한 번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해본 적 없다는 자부심, 웬만한 기계는 눈 감고도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다는 장인의 고집. 그 모든 것이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낡은 돋보기안경의 무게 앞에서 초라하게 짓눌렸다.

스륵.

안경다리가 관자놀이를 누르는 익숙한 감각. 렌즈 너머로 들어온 세상은 다시금 거짓말처럼 선명해졌지만, 그의 마음은 오히려 더 흐려지고 있었다.

작업대 위에 놓인 2.5밀리미터짜리 육각 볼트. 젊었을 적엔 핀셋도 없이 손끝의 감각만으로 집어 올렸던 그 작은 부품이, 오늘따라 유독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는 몇 번이나 손끝으로 볼트를 더듬었다. 예전 같았으면 단박에 잡혔을 것이, 자꾸만 미끄러지며 손가락 사이를 맴돌았다.

그때였다. “선배님, 어디 안 좋으세요?”

상쾌한 시트러스 향이 훅 끼쳐 들어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올해 입사한 신입사원, 오하윤이었다. 그의 딸보다도 두 살이나 어린 스물다섯. 그녀의 젊고 총명한 눈은 돋보기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복잡한 도면 위를 거침없이 스캔하고 있었다.

“아, 아니. 괜찮아. 그냥 잠깐….”

한기성은 말을 얼버무리며 헛기침을 했다. 손에 잡히지 않던 볼트를 얼른 작업대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 초라한 모습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하윤은 그의 돋보기와 도면, 그리고 어색한 손짓을 잠시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영리했다.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더는 묻지 않았다. 그 배려가, 그 침묵이, 칼보다 더 아프게 그의 자존심을 베어냈다.

“저, 선배님. QA팀에서 신형 액추에이터 허용 오차 스펙 다시 확인해달라고 해서요.” “……아, 그거. 이리 줘봐.”

한기성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가 내민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경험’과 ‘감’이라는 성벽이, ‘데이터’와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파도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오후 늦게, 기어이 올 것이 왔다. 생산 라인에 설치된 내선 전화기에서 차가운 벨 소리가 울렸다. 인사팀이었다. “한기성 부장님, 잠시 뵙고 싶습니다.”

젊은 인사팀장은 그의 앞에 ‘행복한 인생 2막!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밝고 선명한 팸플릿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지나치게 세련된 디자인의 팸플릿과, 그의 기름때 묻은 작업복이 어울리지 않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부장님, 이제 정년이 6개월 남으셨습니다. 긴 시간 동안 저희 회사를 위해 헌신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저희 회사에서는 부장님처럼 오랫동안 헌신하신 분들의 제2의 인생을 응원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귀농·귀촌 교육부터 프랜차이즈 창업 지원, 경비 지도사나 요양 보호사 자격증 취득 과정까지….”

친절한 목소리, 예의 바른 말투, 완벽하게 계산된 미소.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이제 당신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부디 조용히, 그리고 품위 있게 떠나주십시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젊은 날의 패기와 땀, 동료들과의 웃음과 눈물, 철야와 특근으로 지새웠던 수많은 밤. 그의 30년 세월이, 고작 이 얇고 반질거리는 팸플릿 한 장의 무게로 환원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한기성은 허름한 포장마차의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한 달에 한 번 갖는 죽마고우들과의 모임이었다. 그의 인생처럼, 각기 다른 네 개의 노년이 소주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크으, 역시 퇴근하고 마시는 소주가 최고야.”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해 세 친구 중 가장 성공한 박재혁이었다. 명품 시계를 찬 그의 손목이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서 유독 번쩍였다.

“야, 기성이 넌 아직도 일해서 좋겠다. 나는 매일 골프 치고 해외여행 다니는데도 시간이 안 가 죽겠다. 아침에 눈뜨면 ‘오늘은 또 뭐 하나’ 싶다니까. 가진 놈의 비애를 너희가 알아?”

그 말에, 퇴직금으로 치킨집을 차린 최민수가 닭 튀기는 냄새가 밴 손으로 코웃음을 쳤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재혁이 넌 아주 복에 겨운 소리를 해라. 나는 하루 12시간씩 뜨거운 기름 앞에 서 있어도 손에 쥐는 게 없어. 배달 앱 수수료 떼고, 월세 내고 나면 오히려 마이너스야. 무릎 쑤시는 건 둘째 치고, 이놈의 가게 언제쯤 접어야 하나 그 생각뿐이다.”

재혁과 민수가 투닥거리는 동안, 사업 실패 후 일용직을 전전하는 이동진은 말없이 소주만 들이켰다. 굳은살이 박이고 갈라진 그의 손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동진이 넌 요즘 뭐 하냐?” 재혁의 물음에 동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 힘없이 답했다. “그냥… 아파트 경비 서. 밤새 순찰 도는 것도 이젠 힘에 부친다. 얼마 전엔 젊은 놈 술 처먹고 들어와서 주차 똑바로 하라고 했다가 멱살까지 잡혔다. 더럽고 치사해도 어쩌겠냐. 먹고는 살아야지.”

세 친구의 얼굴 위로 각기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진 자’의 공허함, ‘평범한 자’의 위태로움, ‘없는 자’의 비참함. 한기성은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6개월 뒤 미래를 보았다. 어떤 미래를 선택하든, 결국은 벼랑 끝이었다.

“기성이 너는? 너는 정년 아직 좀 남았지?” 민수의 질문에 한기성은 애써 웃으며 소주잔을 채웠다. “나야 뭐… 똑같지. 기름밥 먹는 인생, 하루하루 버티는 거지.”

거짓말이었다. 그의 시간은 이제 고작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밤의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내가 차려준 저녁상 앞에서 꾸역꾸역 밥을 넘겼지만,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거실 소파에 무너진 듯 몸을 묻고, 의미 없이 채널만 돌렸다. 요란한 예능 프로그램, 시끄러운 드라마, 심각한 뉴스. 그 어떤 것도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6개월 뒤, 나는 뭘 해야 하지? 재혁이처럼 공허하게 살 수도, 민수처럼 고통스럽게 버틸 수도, 동진이처럼 비참하게 무너질 수도 없다. 그럼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때였다. 아내가 거실 테이블 위에 우편물 하나를 툭 던졌다. “여보, 이거. 딸내미 마지막 학기 등록금 고지서 나왔네.”

428만 원. 선명하게 찍힌 그 숫자가 그의 심장을 쿵 하고 내리찍었다. 퇴직금은 이미 아파트 대출금 갚는 데 거의 다 썼다. 남은 노후자금과 연금으로는 딸의 결혼은커녕, 아내와 자신의 노후도 빠듯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막막함이 검은 파도처럼 그를 덮쳐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띠링!

무심코 돌리던 TV 화면 속에서, 경쾌하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는 효과음과 함께, 지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의 경험이, 가장 위대한 기술입니다.]

화면 속에는 그와 비슷한 연배의 한 노년의 여성이, 근사한 작업실에서 태블릿PC를 들고 무언가 열중하며 정원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그가 잃어버린 지 오래인 ‘자신감’과 ‘활기’가 넘쳐흘렀다.

[나이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세요. 당신만의 인공지능 파트너, MyAISmarteasy.]

광고는 짧았다. 하지만 그 어떤 드라마보다 강렬했다. 한기성은 저도 모르게 리모컨을 쥔 손에 힘을 주며 TV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화면 하단에 작게 쓰인 로고.

‘MyAISmarteasy’

그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서랍을 열어, 몇 년 전 아들이 쓰다 버려둔 구형 스마트폰을 찾아 들었다. 삐걱거리는 손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오랜만에 깨어난 스마트폰이 희미한 불빛을 내뿜었다. 그는 익숙지 않은 손놀림으로 앱 스토어를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검색창에, 그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르는 그 이름을 한 글자씩, 힘겹게 눌러 담았다.

ㅁ… ㅏ… ㅇ… ㅣ…

[MyAISmarteasy]

연관 검색어가 화면에 떠올랐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운로드 버튼을 눌렀다. 작은 아이콘 옆으로, 파란색 진행 막대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남은 인생을 향한,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었다.


 

[제2화] AI의 눈

다음 날 새벽, 한기성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밤새 뒤척인 탓에 몸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정신은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그는 곤히 잠든 아내 몰래 거실로 나와, 밤새 충전해 둔 낡은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파란색 아이콘. [MyAISmarteasy]

어젯밤의 충동적인 행동이 새삼 부끄럽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무슨 기대를 하는 거지? 고작 광고 하나에 홀려서….’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앱을 삭제하려 했다. 일평생을 기계와 씨름하며 살아온 30년 경력의 기술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프로그램 따위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리 없다고, 이성이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아이콘을 길게 눌러, 작은 휴지통 모양의 ‘삭제’ 버튼을 화면 위로 끌어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여보! 당신 오늘 출근하기 전에 저 망할 놈의 세탁기 좀 어떻게 해봐!”

안방에서 아내 혜숙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날아와 그의 등 뒤에 꽂혔다.

“어제도 이불 빨래 돌리는데, 탈수할 때마다 꼭 탱크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니까! 동네 창피해서 살 수가 없어! 당신 평생 기술자로 살았다면서, 집구석 세탁기 하나 못 고치는 게 말이 돼?”

한기성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 세탁기. 5년 전, 큰맘 먹고 최신형으로 장만했던 녀석이다. 1년 전부터 탈수 시에만 덜덜거리는 소음이 나기 시작했다. AS 기사를 불렀지만 “부품 노후 문제입니다. 수리비가 새로 사는 값 나오겠는데요”라는 허무한 답변만 돌아왔다. 그 후로 몇 번이나 분해해서 들여다봤지만, 뚜렷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30년 경험으로도 잡히지 않는, 아주 미세한 불균형이나 마모가 원인일 터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삭제 버튼 위에 멈춰 있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스마트폰을 들고 다용도실로 향했다.

‘그래… 딱 한 번만이다. 이걸로 안 되면 그냥 버리는 거야.’

다용도실의 싸늘한 타일 바닥이 그의 낡은 슬리퍼 너머로 냉기를 전해왔다. 그는 세탁기 앞에 쪼그려 앉아, 다시 한번 MyAISmarteasy 아이콘을 쳐다봤다. 심호흡 한번 하고, 아이콘을 탭했다.

화면이 부드럽게 전환되며, 하얀 배경 위에 파란색 원 하나만 떠 있는 극도로 단순한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잠시 후, 원이 잔잔하게 물결치며 차분하고 중성적인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한기성 님. MyAISmarteasy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한기성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 이름은 또 어떻게 안 거지? 아, 회원가입을 했었나.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는 주위를 한번 휙 둘러보고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세탁기가… 고장이 나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증상이 있나요?]

AI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보다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말했다.

“탈수할 때, 그러니까… 세탁통이 빠르게 돌 때, 쇠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게 나면서 기계 전체가 심하게 흔들려.” [알겠습니다. 소음과 진동 문제로 이해했습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몇 가지 정보가 더 필요합니다. 먼저, 세탁기 모델명을 알 수 있을까요? 보통 제품 전면이나 측면에 부착된 스티커에 적혀 있습니다.]

한기성은 AI가 시키는 대로, 스마트폰 카메라로 세탁기 측면의 에너지 효율 등급 스티커를 비췄다. 화면 속에서 네모난 초록색 박스가 모델명을 정확히 포착해 냈다.

[모델명 ‘TFR-21SSZ’ 확인되었습니다. 이 모델의 일반적인 진동 원인은 수평 불균형, 댐퍼 손상, 또는 드럼 균형추 이탈입니다. 이제 소리를 직접 들어보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탈수 기능을 1분만 작동시켜 주시고, 소음이 가장 심할 때 스마트폰 마이크를 세탁기 뒤쪽으로 가까이 가져가 주세요.]

그는 반신반의하며 세탁기의 전원을 켰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세탁통이 돌기 시작했고, 이내 덜덜덜-! 덜커덩! 하는 익숙한 굉음이 다용도실을 울렸다. 그는 AI의 지시대로, 스마트폰을 세탁기 등 뒤로 가져다 댔다.

1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작동을 멈추자, AI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음 패턴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32.5Hz 대역에서 주기적인 충격파가 감지됩니다. 이는 균형추 이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탁기 후면 패널을 촬영해 주세요. 제가 문제 지점을 찾아보겠습니다.]

한기성은 이미 자신의 의지 같은 건 잊은 지 오래였다. 그는 익숙하게 공구함에서 십자드라이버를 꺼내 세탁기 후면 패널을 열었다. 복잡한 모터와 벨트, 앙상한 뼈대 같은 댐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그 내부를 비췄다.

[스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화면 속에서, AI가 내부 구조를 3차원 모델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부품들이 각자의 위치에 자리 잡고, 이내 화면에 완벽한 3D 도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AI는 그 도면의 한 부분을 빨간색 원으로 표시하며 확대했다.

[진단이 완료되었습니다, 한기성 님.] [드럼 상단 좌측에 위치한 콘크리트 균형추를 고정하는 13밀리미터 육각 볼트가 약 1.5회전가량 풀려 있습니다. 이 볼트의 이격으로 인해 고속 회전 시 드럼 전체의 균형이 무너져 소음과 진동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기성의 눈이 커졌다. 균형추 볼트. 그가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육안으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던 미세한 풀림이었다. 소리의 주파수를 분석하고, 그걸 부품의 진동 가능성과 연결 짓다니. 이건 인간의 ‘감’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13밀리미터 복스 소켓 렌치를 사용해 해당 볼트를 시계 방향으로 단단히 조여주십시오. 예상 체결 토크는 45N·m입니다.]

“…….”

그는 홀린 듯 자신의 공구함으로 향했다. 먼지 쌓인 공구들 속에서, 그의 손때가 묻은 13밀리미터 소켓과 렌치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AI가 알려준 바로 그 위치에 렌치를 끼우고, 힘을 주어 돌렸다.

딸칵. 딸칵.

그의 예상이 맞았다. 정말로 볼트가 헐거워져 있었다. 단단히 조이고 나자, 마치 아픈 이가 제자리를 찾은 듯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세탁기 전원을 켰다. 탈수 버튼을 눌렀다.

위이이이잉-

세탁통이 조용하고 매끄럽게, 그리고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탱크가 지나가던 굉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모터가 돌아가는 기분 좋은 소리만이 다용도실을 가득 채웠다.

완벽했다.

“여보! 시끄러운 소리 안 나네? 다 고친 거야?” 어느새 다가온 혜숙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용케 고쳤네. 진작 좀 하지.”

아내의 핀잔 섞인 칭찬. 그것은 그 어떤 격려나 위로보다도 그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집에서조차 무기력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아내 앞에서 다시 ‘능력 있는 남편’이 되었다.

그날 밤, 한기성은 잠들지 못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스마트폰 화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MyAISmarteasy’

그것은 더 이상 정체 모를 수상한 앱이 아니었다. 그의 흐릿해진 눈을 대신해 준 ‘AI의 눈’이자, 그의 무뎌진 감을 뛰어넘게 해 준 ‘AI의 두뇌’였다.

그의 머릿속에 공장의 거대한 설비들이 스쳐 지나갔다. 최신 시스템 앞에서 버벅거리던 자신의 초라한 모습, 젊은 팀장의 경멸 어린 눈초리, 그리고 “선배님…”이라며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던 오하윤의 얼굴까지.

새로운 생각이, 마치 작은 불씨처럼 그의 마음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만약에… 만약에 이 녀석을 공장에서 쓸 수 있다면?’ ‘집에 있는 20년 된 세탁기도 고치는데, 공장의 저 기계들이라고 못 할 건 없지 않은가?’

그는 다시 앱을 실행시켰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AI에게 질문을 던졌다.

“MyAISmarteasy.” [네, 한기성 님. 말씀하세요.] “산업용 서보 모터의… 예측 정비에 대해서 알려줘.”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어색함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의 인생 2막을 열어줄 새로운 파트너를 향한,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첫걸음이었다.


 

[제3화] 팀장님, 그건 틀렸습니다

다음 날, 공장으로 향하는 한기성의 발걸음은 어제와 사뭇 달랐다. 지난밤, 그는 돋보기안경을 낀 채 낡은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날을 꼬박 새웠다. ‘MyAISmarteasy’가 그의 30년 경험에 ‘예측 정비’라는 새로운 날개를 달아준 밤이었다.

고장은 항상 갑자기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AI는 달랐다. 기계가 내뿜는 미세한 진동, 정상 범위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온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소음의 주파수 변화. 그 모든 데이터를 종합하면, 기계는 고장 나기 훨씬 전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치 사람이 병에 걸리기 전에 미열과 기침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그는 이제 그 신호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불안했다. 어젯밤의 성공은 그의 집 다용도실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서 일어난 작은 기적일 뿐이다. 수십억짜리 설비가 맞물려 돌아가는 이 거대한 공장에서, 고작 스마트폰 앱 하나가 통할 리 없다고 이성이 경고했다.

‘그래, 아직은 아니야. 조금 더 배우고, 더 확실해졌을 때….’

그가 스스로에게 조심스러운 다짐을 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삐- 삐- 삐-!

공장 전체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생산 라인 천장에 설치된 ‘안돈(Andon)’ 시스템의 붉은 경광등이 섬광처럼 번쩍이며, 모든 설비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3라인 정지! 3라인 정지했습니다!”

작업반장의 다급한 외침이 공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메인 라인의 정지는 곧 생산의 마비를 의미했다.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발생하는 수억 원대의 페널티, 신뢰도 하락, 이어질 고객사의 클레임까지. 1분 1초가 돈으로 환산되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사무실에서 뛰쳐나온 젊은 팀장, 김태준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는 신형 태블릿 PC를 든 채 곧장 3라인의 메인 컨트롤 패널로 향했다.

“원인이 뭐야! 시스템 로그 확인해!”

김태준은 명문대 기계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최연소 팀장으로 부임한 회사의 엘리트였다. 그는 구시대적인 ‘감’이나 ‘경험’ 따위를 멸시했다. 오직 모니터에 뜨는 ‘데이터’와 ‘시스템’만이 진리라고 믿는 남자였다.

“팀장님! 시스템 로그에는 전부 정상으로 나옵니다! 전력 공급, 모터 출력, 센서 값 전부 그린 상태입니다!”

오하윤을 포함한 젊은 엔지니어들이 컨트롤 패널에 달라붙어 외쳤다. 김태준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말도 안 돼! 시스템이 정상인데 라인이 멈추는 게 어딨어! 컨트롤러 리부팅해! 안 되면 라인 전체 전원 리셋이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나이 든 작업자들이 술렁였다. 라인 전체를 리셋한다는 건, 모든 설정을 처음부터 다시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최소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리는 대작업. 그 시간 동안의 손실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한기성은 그 모든 소동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시스템은 정상이라고? 하지만 그의 귀에는 분명, 라인이 멈추기 직전부터 들려온 미세한 이명이 있었다. 마치 쇠붙이를 아주 고운 사포로 긁어내는 듯한, 고주파의 소음.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어젯밤 AI가 그에게 가르쳐 준 수많은 고장 전조 증상 중 하나와 너무나도 흡사한 소리였다.

‘설마….’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다른 직원들의 눈을 피해, 마치 개인적인 메시지를 확인하는 척하며 MyAISmarteasy 앱을 실행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한기성은 녹음 기능을 켰다. 그는 일부러 문제가 된 설비 근처로 천천히 걸어가며, 태연한 척 허리를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스마트폰 마이크는 공장 전체의 소음을 빨아들였다. 그는 녹음 파일을 AI에게 전송했다.

[소음 패턴 분석 중입니다. 다른 소음이 너무 많아 정확한 분석이 어렵습니다. 혹시 문제가 발생한 설비의 종류와, 정지 직전의 특이사항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AI의 답변은 명쾌했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바로 그때, 김태준이 폭발했다.

“젠장! 리부팅해도 안 되잖아! 당장 라인 전체 리셋 준비해! 한 부장님은 뭐 하십니까? 구경만 하지 마시고 이리 와서 뭐라도 거드시죠! 평생 만졌던 기계 아닙니까!”

모든 시선이 한기성에게로 쏠렸다. 비아냥과 조롱이 섞인 김태준의 목소리. 한기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이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다시 AI에게, 이번엔 음성이 아닌 텍스트로 빠르게 입력했다. ‘3라인 컨베이어 벨트 이송 시스템. 정지 직전 고주파 소음 발생. 시스템 로그는 정상.’

AI의 답변은 거의 즉시 돌아왔다.

[입력된 정보와 소음 패턴을 교차 분석했습니다. 시스템이 감지하지 못하는 기계적 오류일 가능성이 92.4%입니다. 특히, 이송 시스템의 ‘포토 센서’ 브래킷(고정대)에 미세 균열이 발생하여, 진동으로 인해 센서의 정렬 값이 틀어졌을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이 경우, 시스템은 센서 자체의 고장이 아니므로 정상으로 인식하지만, 물리적으로는 물체를 감지하지 못해 라인을 멈추게 됩니다.]

빙고.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한기성은 확신에 찬 걸음으로 김태준에게 다가갔다.

“잠깐만요, 팀장님.”

김태준이 잔뜩 신경질이 난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뭡니까, 한 부장님? 지금 바쁜 거 안 보이십니까?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으세요?”

주변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구시대의 늙은 기술자와, 시스템을 신봉하는 젊은 엘리트의 정면충돌이었다. 한기성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김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 그건 틀렸습니다.”

공기 중에 팽팽한 정적이 흘렀다.

“라인 리셋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뭐라고요? 그럼 부장님은 원인을 아시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시스템에도 안 나오는 원인을?”

김태준의 목소리에 노골적인 조소가 어렸다. 한기성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3라인 컨베이어 벨트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3번 이송 벨트의 포토 센서. 저 센서를 고정하는 브래킷을 확인해 보십시오. 아마 미세한 균열이 생겨서, 진동 때문에 센서 정렬이 틀어졌을 겁니다. 기계는 멀쩡한데 눈이 삐뚤어져서 앞을 못 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는 AI가 알려준 기술적인 설명을, 자신이 평생을 써온 쉬운 비유로 바꾸어 설명했다. 김태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센서 브래킷요? 지금 장난하십니까? 그깟 쇳조각 하나 때문에 수십억짜리 라인이 멈춘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게 될 겁니다.”

한기성의 단호한 태도에, 주변 엔지니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오하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팀장님, 일단… 확인이라도 해보는 게 어떨까요? 시간도 얼마 안 걸릴 것 같은데….”

김태준은 오하윤을 힐끗 쳐다보더니, 못 이기는 척 고개를 까딱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원하신다면. 하지만 만약 아무 이상 없으면, 한 부장님은 이 사태에 대해 책임질 각오 하셔야 할 겁니다.”

젊은 엔지니어 하나가 공구를 들고 문제의 센서로 다가갔다. 그가 손전등으로 브래킷 구석구석을 비추는 순간,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 진짜네! 여기, 용접 부위 아래쪽에 머리카락 같은 실금이 가 있습니다!”

그 말에 김태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기성이 다시 말했다.

“그 브래킷, 재고 있을 테니 교체하십시오. 5분도 안 걸릴 겁니다.”

모든 것은 한기성의 말대로였다. 브래킷을 교체하고 센서의 정렬을 다시 맞추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안돈의 붉은 경광등이 꺼지고, 라인 전체에 푸른 정상 가동 램프가 들어왔다.

우우웅- 거대한 라인이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기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경외, 놀라움, 그리고 당혹감. 특히, 김태준 팀장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 오하윤이 한기성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은 이전의 동정이나 배려가 아닌, 순수한 경이로움과 지적인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선배님. 아까 그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시스템에는 정말 아무 기록도 없었는데…. 고주파 소음만으로, 저 수많은 부품 중에 브래킷 균열을 짚어내신 건….”

한기성은 그녀를 보며, 30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슬쩍 만지작거렸다.

“글쎄… 30년 넘게 듣다 보니, 이젠 기계가 나한테 말을 걸어. 아프다고, 하소연을 한다고.”

그의 대답에, 오하윤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한기성이라는, 낡고 오래된 기계라고만 생각했던 이 남자의 내부에,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엔진이 숨겨져 있음을 직감했다.

그것은 한기성이 회사에서 거둔, 그의 인생 첫 번째 역전승이었다.


 

[제4화]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공장의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한기성이 탈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시끄럽던 동료들의 잡담 소리가 순간 멎었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색하게 이어졌다. 그를 향하는 시선들 속에는 이전과 다른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어떤 눈은 순수한 경외를 담고 있었다. 평생을 기계와 함께 살아온 동년배들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통쾌해하며 남몰래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떤 눈은 날 선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젊은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의 데이터와 시스템이 놓친 것을 30년의 ‘감’으로 찾아낸 이 늙은 기술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힐끔거렸다.

그리고 가장 차가운 눈. 아침 조회 시간, 생산 라인 앞에 선 김태준 팀장의 눈은 분노와 수치심이 뒤섞여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그는 어제의 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하지만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한기성을 피하고 있었고,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소리 없는 경고였다.

“오늘부터 전사적으로 ‘생산 효율 5% 향상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각 라인은 공정별 비효율 요소를 찾아내 개선안을 보고하도록. 특히 3라인, 어제 잠깐 멈췄던 만큼 오늘부터 두 배로 정신 차려야 할 겁니다.”

김태준은 ‘잠깐’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의도적으로 어제의 사건을 폄하했다. 한기성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폭풍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오전 작업이 막 시작될 무렵, 김태준이 직접 한기성을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보고서 파일이 들려 있었다.

“한 부장님.” 그의 목소리는 어제의 신경질적인 톤과 달리,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고 사무적이었다. “어제 3라인 문제 해결,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부장님의 그 ‘연륜’과 ‘감’이라는 거, 시스템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저도 어렴풋이 깨닫게 됐습니다.”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칭찬의 형식을 빌린, 잘 벼려낸 칼날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부장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제대로 한번 발휘해 볼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김태준은 들고 있던 보고서 파일을 한기성의 작업대 위에 툭 던졌다. “3라인의 유령. 들어보셨습니까?”

한기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3라인의 유령. 지난 5년간 3라인의 모든 엔지니어들을 괴롭혀 온, 원인 불명의 간헐적 에러를 부르는 별명이었다.

증상은 기묘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아무런 예고 없이 라인 전체의 생산 속도가 12초간 미세하게 느려졌다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스템 로그에는 아무런 기록도 남지 않았다. 문제는 그 12초의 미세한 지연이, 후공정의 초정밀 프레스 기계와의 동기화(Synchronization)를 틀어지게 만들어 엄청난 불량품을 쏟아낸다는 점이었다.

지난 5년간 이 ‘유령’을 잡기 위해 본사 연구팀은 물론, 설비를 제작한 독일 본사의 엔지니어들까지 다녀갔지만, 누구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저 ‘측정 불가능한 전력 노이즈’ 혹은 ‘제어 시스템의 소프트웨어 버그로 추정’이라는 애매한 결론만 내리고 돌아갔을 뿐이었다.

김태준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회사는 이 유령 때문에 매년 수억 원의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시스템도, 데이터도, 심지어 이 기계를 만든 독일 놈들도 못 잡는 이 유령을, 한 부장님의 그 대단한 ‘감’으로 한번 잡아보시죠. 공식적인 TF(태스크 포스) 팀장으로 임명해 드리겠습니다. 명예로운 일 아닙니까?”

덫이었다. 성공하면 모든 공은 팀장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고, 실패하면 ‘역시 구닥다리 감은 별거 아니었다’며 어제의 일을 운으로 치부하고 그를 완벽하게 조롱할 수 있는, 김태준에게는 잃을 게 없는 게임.

주변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한기성을 바라봤다. 모두가 김태준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상의 공개적인 망신 주기였다.

한기성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 어젯밤, AI와 함께 들여다보았던 예측 정비의 원리가 스쳐 지나갔다. ‘모든 고장에는 반드시 신호가 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보고서 파일을 집어 들었다.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죠.”

그의 대답에 김태준의 얼굴에 아주 잠깐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좋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부장님. 부디 부장님의 ‘감’이 녹슬지 않았기를 빌어야겠군요.”

김태준이 빈정거리며 돌아섰다. 한기성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주머니 속 낡은 스마트폰을 꽉 쥐었다. 이제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날 오후, 한기성은 자신에게 배정된 작은 임시 사무실에 앉아, 지난 5년간의 ‘유령’ 관련 보고서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씨름했다. 수백 장에 달하는 보고서는 빼곡한 데이터와 그래프로 가득했지만, 결론은 모두 똑같았다.

‘원인 불명.’

그는 곧장 MyAISmarteasy를 실행했다. “MyAISmarteasy. ‘3라인의 유령’에 대해서 알려줘.” [죄송합니다, 한기성 님. ‘3라인의 유령’이라는 명칭만으로는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합니다.]

역시나였다. AI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정확한 데이터가 입력되어야만 최적의 결과를 도출하는 냉철한 분석가였다.

그는 지난 5년간의 보고서 내용을 하나하나 요약해서 텍스트로 입력하기 시작했다. ‘간헐적 라인 속도 저하. 불규칙적 발생. 시스템 로그 기록 없음. 불량품 발생….’

몇 시간을 낑낑대며 자료를 입력했지만, AI의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입력된 정보만으로는 원인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많은 변수가 존재합니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과거 5년간의 3라인 전체의 센서 데이터 로그, 전력 사용량 패턴, 생산 관리 시스템(MES) 기록, 심지어 라인이 위치한 공간의 온도 및 습도 데이터까지, 가능한 모든 원시 데이터(Raw Data)가 필요합니다.]

한기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데이터들은 모두 회사 중앙 서버에 저장되어 있고, 접근 권한은 팀장급 이상 엔지니어들에게만 있었다. 자신이 공식적인 TF 팀장으로 임명되긴 했지만, 김태준이 순순히 그 자료들을 내어줄 리가 만무했다.

꼼짝없이 막혀버린 상황. 그가 좌절감에 휩싸여 뻑뻑한 눈을 비비던 그때였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오하윤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선배님… 아니, 팀장님.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어, 어서 와요, 하윤 씨.” “팀장이라니요, 그냥 편하게 선배님이라고 부르세요.”

오하윤은 커피 한 잔을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산더미 같은 보고서를 힐끔 쳐다봤다. “역시… ‘유령’ 잡고 계셨군요.” “…….” “김 팀장님, 너무하시는 것 같아요. 이건 사실상….”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기성은 씁쓸하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괜찮아. 어차피 정년 앞둔 늙은이, 마지막으로 뭐라도 해봐야지.”

오하윤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선배님. 어제… 정말 대단하셨어요. 솔직히 저는 믿지 않았거든요. 경험이나 감 같은 건, 그냥 데이터가 부족했던 시절의 낡은 유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제 선배님을 보고, 제가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어요.”

그녀는 자신의 태블릿 PC를 켰다. 화면에는 복잡한 그래프와 수식들이 가득했다. “그래서 어젯밤에, 제가 3라인의 소음 데이터를 다시 분석해 봤어요. 선배님이 들으셨다는 그 고주파 소음. 그걸 기준으로 필터링해서 보니까, 정말로 브래킷의 고유 진동 주파수와 일치하는 패턴이 희미하게 보이더라고요. 시스템 경고 기준치 이하라 그냥 노이즈로 처리됐던 거였어요. 그걸 귀로 잡아내신 거잖아요.”

한기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귀가 아니라 AI의 귀였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오하윤은 한층 더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혹시… 제가 도울 일 없을까요?” “……?” “제가 가진 건 데이터 분석 능력밖에 없어요. 선배님의 30년 경험과 제 기술을 합치면, 어쩌면… 저 유령,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한기성은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젊고, 총명하며, 무엇보다 편견 없이 진실을 보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엔지니어. 자신에게 없는 모든 것을 가진 파트너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필요해. 그것도 아주 많이.”

그는 AI가 요구했던 데이터 목록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오하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이 모든 자료를요? 이건 거의 3라인 5년 치의 모든 기록인데….” “가능할까?” “……김 팀장님 몰래 빼내려면…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제 접근 권한으로 조금씩, 나눠서 백업하면….”

그녀의 눈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스쳤다. 마치 거대한 비밀 작전을 꾸미는 스파이처럼.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유령 잡고 나면, 그때 그 ‘감’의 비결이 뭔지 저한테만 살짝 알려주셔야 해요.”

한기성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대를 뛰어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어색하지만 완벽한 공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부터, 두 사람의 비밀 작전이 시작되었다. 오하윤은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중앙 서버의 방대한 데이터를 USB에 조금씩 옮겨 담았다. 그 양은 수십 테라바이트에 달했다.

“이걸… 다 어떻게 분석하죠?” USB를 건네며 오하윤이 기가 질린 듯 물었다. “나한테… 아주 유능한 비서가 하나 있거든.”

한기성은 데이터를 자신의 낡은 노트북에 옮기고, 스마트폰과 연결했다. 그리고 MyAISmarteasy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입력되는 모든 데이터를 분석해서, ‘간헐적 라인 속도 저하’ 현상과 상관관계가 있는 모든 패턴을 찾아내.’

[명령을 수락했습니다. 데이터 분석을 시작합니다. 예상 소요 시간은 7시간 38분입니다.]

스마트폰 화면에 복잡한 데이터 처리 그래프가 떠오르고, 노트북 팬이 굉음을 내며 돌기 시작했다. 마치 구형 엔진에 제트 연료를 쏟아부은 듯했다.

다음 날 아침, 분석이 완료되었다. AI의 첫 번째 발견은 충격적이었다.

[분석 결과, ‘라인 속도 저하’ 현상은 생산량이나 특정 부품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대신, 공장 외부의 요인과 97.8%의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바로, ‘전력망의 미세 전압 강하’와 ‘공장 내부의 상대 습도 40% 이하’ 조건이 동시에 충족될 때, 5분 이내에 현상이 발생합니다.]

“말도 안 돼….” 보고를 받은 오하윤이 중얼거렸다. “전압이랑 습도라고요? 그건 기계 자체의 결함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그런 걸….”

AI의 분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과거 데이터를 시뮬레이션한 결과, 이 두 조건이 충족될 때, 3라인의 7번 제어 캐비닛 내부의 ‘노이즈 필터’ 온도가 순간적으로 0.2도 상승하는 패턴이 발견됩니다. 이는 정상 범주 내의 변화라 시스템 로그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다. 유령의 심장은 ‘7번 제어 캐비닛’ 안에 있었다.

두 사람은 그날 이후, 일기예보와 전력 사용량 데이터를 주시하며 유령이 나타날 조건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오지 않아 건조하고, 주변 공단 전체의 전력 사용량이 급증하는 오후. 두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7번 제어 캐비닛 앞에 섰다. 오하윤은 태블릿으로 실시간 데이터를 모니터링했고, 한기성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그의 손에는 MyAISmarteasy가 켜진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전압,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습도 38%!” 오하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바로 그때였다. 한기성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렸다. 치직-

마치 건조한 스웨터에서 정전기가 튀는 듯한, 아주 미세한 스파크 소리. 그 순간, 오하윤의 태블릿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속도 저하 발생! 1.3초간!”

한기성은 눈을 번쩍 떴다. “방금 그 소리. 캐비닛 안쪽, 파워 서플라이 근처에서 났어.”

그는 AI에게 방금 녹음된 소리와, 오하윤이 확인한 실시간 데이터를 동시에 전송했다.

[최종 진단이 완료되었습니다.] AI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7번 제어 캐비닛 내부, 메인 파워 서플라이로 연결되는 접지(Ground) 케이블의 절연 피복이, 장기간의 미세 진동으로 인해 노후화되었습니다. 건조한 환경에서 미세 전압 강하가 발생할 때, 이 손상된 피복 부위에서 공기 중으로 ‘정전기 방전(아크)’이 발생합니다. 이 순간적인 방전 노이즈가 바로 옆에 위치한 ‘메인 제어 보드’의 통신 신호를 간섭하여, 1~2초간의 데이터 처리 지연을 유발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모든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독일 본사도, 회사의 엘리트들도 찾지 못했던 유령의 정체는, 고작 낡아빠진 케이블 하나의 ‘정전기’였다. 너무나 사소해서, 너무나 기막힌 조합이라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원인이었다.

해결책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절연 성능이 강화된 새 접지 케이블로 교체하는 것. 단돈 몇만 원짜리 부품이었다. 그날 이후, 3라인의 유령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 후, 오하윤은 완벽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김태준에게 제출했다. 보고서에는 전압과 습도의 상관관계 그래프, 노이즈 필터의 온도 변화 데이터, 그리고 문제의 케이블 사진까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데이터’로 가득했다. 그리고 보고서의 결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상기 데이터 분석은, 한기성 부장님의 ‘소음 변화에 근거한 기계적 결함 가능성 제시’라는 베테랑의 직관적 통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임.’

오하윤은 AI의 존재를 숨기는 동시에, 한기성의 공을 완벽하게 치켜세워 주었다.

보고서를 받아 든 김태준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이제 분노나 수치심을 넘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듯한 공포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기성에게 다가왔다.

“한 부장님.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비아냥거리지 않았다. 순수한 의문이었다.

한기성은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잖습니까. 오래 듣다 보면, 기계가 말을 건다니까요.”

그날 저녁, 퇴근하려던 한기성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포장마차 친구, 치킨집 사장 최민수였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죽어 있었다.

[“여… 여보세요? 기성이냐? 나 민수인데….”] “어, 웬일이야?” [“저기…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면 내 가게로 한번 와 줄 수 있냐? 튀김기가… 튀김기가 이상해. AS를 불러도 원인을 모른다는데, 닭이 자꾸 타서 나와…. 나 정말 죽을 것 같다, 친구야….”]

한기성은 전화를 끊고, 잠시 공장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의 인생 2막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무대는 더 이상 이 공장 하나에 국한되지 않을 터였다.


 

[제5화] 친구의 눈물, 나의 AI

늦은 밤, 최민수의 치킨 가게는 흥겨운 노랫소리 대신 타들어 가는 기름 냄새와 깊은 한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한기성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넋이 나간 채 튀김기 앞에 주저앉아 있는 친구의 초라한 뒷모습이었다.

“민수야.”

한기성의 목소리에, 최민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기름과 땀, 그리고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기성아… 와줬구나. 미안하다, 이 늦은 시간에….” “미안하긴. 무슨 일이야, 대체.”

최민수는 말없이 가게 구석에 쌓인 쓰레기봉투를 가리켰다. 봉투 밖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닭다리들이 흉측하게 삐져나와 있었다.

“저거 봐라. 오늘 하루 종일 버린 닭만 스무 마리가 넘어. AS 기사는 세 번이나 다녀갔는데, 온도 센서도 정상, 타이머도 정상, 아무 문제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하고 가더라. 근데 튀김기에 넣으면 겉은 시커멓게 타고, 속은 익지도 않아. 나 정말… 나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성아.”

그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떨려왔다. 이 작은 가게는 그의 전 재산이자, 가족의 생계가 걸린 마지막 보루였다.

한기성은 말없이 작업복 소매를 걷어붙였다. 공장의 수십억짜리 설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구조는 단순했지만, 친구의 인생이 걸린 이 튀김기의 무게는 그 어떤 기계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먼저 튀김기를 꼼꼼히 살폈다.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가 주방용 의자를 가져와 튀김기 앞에 앉으며, 주머니에서 낡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최민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성아, 뭐 하냐? 인터넷으로 수리 방법이라도 찾아보게?”

“아니. 나한테… 아주 유능한 파트너가 하나 있거든.”

한기성은 익숙하게 MyAISmarteasy 앱을 실행했다. 그리고는 최민수에게 앱 화면을 보여주었다.

[MyAISmarteasy]

최민수는 화면에 뜬 생소한 로고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이… 에이아이… 스마트이지? 이게 뭔데?”

“그냥 AI 비서 같은 거야. 회사에서 쓰는 그런 거창한 AI 말고, 딱 나한테만 맞춰진 거. ‘My AI’, 즉 ‘나의 AI’라는 뜻이지. 남의 것이나 회사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것이라는 거야.”

한기성은 2화에서 세탁기를 고쳤던 때를 떠올리며, 차분하게 AI에게 말을 걸었다. “MyAISmarteasy. 지금부터 상업용 튀김기 문제를 해결할 거야.”

[안녕하세요, 한기성 님. 문제를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그는 최민수에게 들었던 증상을 그대로 AI에게 설명했다. 겉은 타고 속은 익지 않는 현상, AS 기사도 원인을 찾지 못한 상황까지.

AI의 답변은 명쾌했다. [일반적인 원인은 온도 센서의 오류 또는 히터의 불균일한 가열입니다. 하지만 AS 기사가 센서가 정상이라고 판단했다면,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튀김에 사용하는 ‘기름’에 대한 정보를 주실 수 있나요? 언제 마지막으로 교체하셨고, 어떤 종류의 기름을 사용하시는지 알려주세요.]

“기름?” 최민수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기름은 어제 아침에 새것으로 갈았어. 늘 쓰던 거야, O사 튀김 전용유.”

한기성은 그 내용을 그대로 AI에게 전달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을 위해 몇 가지 테스트가 필요합니다. 먼저 튀김기의 설정 온도를 170도로 맞추고, 기름만 가열해 주세요. 그리고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해, 기름의 표면이 어떻게 끓어오르는지를 촬영해서 보여주십시오. ‘Smarteasy’, 즉 ‘더 영리하고 쉽게’ 문제를 찾아보죠.]

AI가 자신의 이름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언급했다. 한기성은 이제 AI와의 협업이 낯설지 않았다. 똑똑한 신입사원과 머리를 맞대는 기분이었다.

최민수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튀김기 전원을 켰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기름의 온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설정 온도에 도달하자, 기름 표면에 작은 기포들이 뽀글거리며 올라왔다. 한기성은 그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촬영했다.

[영상 분석을 완료했습니다. 기름의 대류 현상이 비정상적으로 빠릅니다. 표면의 온도는 170도에 도달했지만, 히터와 가까운 바닥 부분의 온도는 순간적으로 200도 이상까지 치솟는 ‘과열 현상’이 관찰됩니다.]

“과열이라고? 아니, 온도 센서는 정상이라니까!” 최민수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AI가 차분하게 설명을 이었다. [온도 센서는 기름 전체의 평균 온도를 측정합니다. 따라서 국소적인 과열 현상은 감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 현상의 원인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히터 자체의 결함. 둘째, 기름의 산패(酸敗)로 인한 발연점 저하.]

“산패? 어제 막 간 새 기름이라니까!” [기름의 산패는 사용 시간뿐만 아니라, 보관 상태에 따라서도 급격히 진행될 수 있습니다. 특히 빛과 열에 장기간 노출되었을 경우, 새 기름이라도 쉽게 산패될 수 있습니다. 혹시 어제 교체하신 기름의 보관 장소가 어디였나요?]

그 말에 최민수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보관 장소…? 그냥… 가게 뒤편에….”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한낮의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가게의 후문 쪽이었다. 한기성은 어제 갈고 남은 새 기름통을 가져와 달라고 했다. 뚜껑을 열자, 보통의 식용유와는 다른, 미세하게 시큼하면서도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산패가 맞았다.

AI의 분석이 이어졌다. [산패된 기름은 발연점이 정상 기름보다 현저히 낮아집니다. 따라서 튀김기가 설정 온도인 170도를 맞추기 위해 히터를 가동하면, 낮은 발연점 때문에 기름이 순간적으로 타버리면서 닭의 겉면을 태우고, 내부까지 열이 전달될 시간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AS 기사들은 튀김기 ‘기계’만 봤기 때문에, ‘재료’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겁니다.]

모든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최민수는 그 자리에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스무 마리가 넘는 닭을… 내 손으로 다 태워버린 거란 말이야…?”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무지와 부주의가 모든 것을 망쳤다는 자책감이 그를 덮쳤다.

한기성은 말없이 친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는 새 기름을 사 오라고 했다. 30분 후, 편의점에서 급히 공수해 온 새 기름으로 교체하고 닭을 튀기자, 언제 그랬냐는 듯 완벽한 황금빛의 치킨이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내며 떠올랐다.

문제가 해결된 후, 두 사람은 가게 테이블에 마주 앉아 캔 맥주를 땄다.

“기성아… 고맙다. 정말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나 오늘 가게 문 닫을 뻔했다.” 최민수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근데… 아까 그 핸드폰 뭐냐, 진짜. 어떻게 기계도 아닌 기름 문제를 다 알아내냐? 무슨 요술 방망이 같네.”

한기성은 씩 웃으며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요술 방망이가 아니야. 이건 그냥… ‘나의 똑똑하고 쉬운 파트너’일 뿐이야. ‘My AI, Smarteasy’.”

그는 친구에게 설명했다. AI는 정답을 바로 알려주는 신이 아니라고. 내가 겪는 문제를 정확히 설명하고, 내가 가진 정보를 최대한 많이 줘야만, 녀석도 함께 고민하며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주는 거라고. 마치 사람과 사람이 협업하는 것처럼.

“결국 중요한 건 AI를 쓰는 ‘나’ 자신이야. 이 녀석을 완벽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어. 그저 자동차 운전하듯이, 능숙하게 ‘활용’할 줄만 알면 되는 거지. 내 30년 경험이 이 녀석을 만나니까,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문제를 보게 되더라고.”

그의 설명에, 최민수는 부러움과 존경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게를 나서는 한기성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그는 더 이상 정년을 앞둔 셔츠칼 낡은 기술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의 무기를 손에 쥔, 든든한 해결사였다.

그의 머릿속에, 문득 또 다른 친구,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는 이동진의 지친 얼굴이 떠올랐다.

‘동진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려나.’

그의 인생 2막은, 이제 그의 주변 사람들의 삶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6화] 세상에서 가장 긴 순찰길

최민수의 치킨 가게에서 나온 한기성의 마음 한편에는 따뜻한 보람이, 다른 한편에는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친구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뿌듯함도 잠시, 포장마차에서 보았던 이동진의 지친 얼굴이 아른거려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새 순찰을 돌아 무릎이 성할 날이 없다던 친구. 젊은 놈에게 멱살을 잡히고도 아무 말 못 했다던 그 처진 어깨.

‘동진이는… 지금도 그 차가운 아파트 단지를 돌고 있겠지.’

그 생각이 들자, 그는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택시를 잡아타고, 그가 기억하는 이동진의 근무지, 강변의 대단지 아파트로 향했다. 거대한 성채처럼 늘어선 아파트 단지는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 불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유독 더 어둡고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 혹시나 친구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싶어 조심스럽게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이동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절뚝. 절뚝.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동진의 오른쪽 무릎이 비명을 지르는 듯, 그의 걸음걸이는 위태로웠다. 그는 손전등으로 주차된 차들 사이를 비추며, 순찰 카드 리더기에 자신의 근무 카드를 힘겹게 찍고 있었다.

한기성은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주차장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때였다.

끼이익-! 요란한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번쩍이는 외제 스포츠카 한 대가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운전석에서 내린 것은 한눈에 봐도 오만함이 가득한 젊은 남자였다. 그는 주차선을 두 칸이나 차지하며 차를 비딱하게 세워놓고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경적을 짧게 울렸다.

이동진이 절뚝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주차는 똑바로 해주셔야….” “아, 씨. 자리도 넓은데 뭘 그래요? 알아서 해요, 좀!”

젊은 남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보란 듯이 차 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 홀로 향했다. 이동진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차 키를 맡기지도 않은 그 비싼 외제차를 대신 주차하기 위해 운전석에 올라탔다.

한기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뜨거워졌다. 저것이 자신의 친구가 매일 밤 겪고 있는 현실이었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깊은,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순간들.

그는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었다. 이동진이 주차를 마치고 나오자, 그에게 다가갔다.

“동진아.”

이동진은 갑자기 나타난 한기성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 기성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그의 얼굴에는 반가움보다 당혹감과 수치심이 먼저 어렸다. 가장 초라한 모습을 친구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너 일하는 곳이라길래 한번 와봤다.” 한기성은 애써 태연한 척 둘러댔다. “무릎은… 많이 안 좋은가 보네.”

“어? 아, 아니야. 괜찮아. 그냥 고질병이지 뭐. 이 나이 되면 다들 어디 하나씩은 고장 나잖아.” 이동진은 황급히 다리를 절지 않으려 애쓰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한기성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내가 뭐… 도와줄 일 없을까?” 한기성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동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의 눈에 날 선 경계심이 스쳤다.

“도와줄 일? 없어. 됐어, 임마. 네 신세 질 일 없어. 이게 내 인생인데 어쩌겠냐. 구경거리 났다고 동정하지 말고, 어서 가봐.”

그는 한기성의 시선을 피하며 돌아섰다. 그의 굽은 등이 ‘나는 괜찮으니, 제발 나를 내버려 두라’고 외치고 있었다.

한기성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친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부술 수는 없었다. 그는 그저 “알았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낮에 다시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그리고는 경비반장에게 어젯밤 이동진이 맡았던 야간 순찰 경로와 시간표를 한 부 얻었다. “친구가 여기서 일하는데, 하도 힘들다고 해서 어떤가 궁금해서 그런다”는 어설픈 핑계를 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구겨진 순찰 경로 지도를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A4 용지 한 장에 빼곡하게 그려진 동선. 지하 4층부터 지상 35층 옥상까지, 총 28개의 순찰 포인트를 3시간마다 한 번씩, 하룻밤에 총 3번 돌아야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그는 MyAISmarteasy를 실행했다. “MyAISmarteasy. 지금부터 ‘보행 경로 최적화’ 문제를 해결할 거야.” [알겠습니다, 한기성 님. 분석할 경로 정보를 입력해 주세요.]

그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순찰 지도를 촬영했다. 그리고 각 순찰 포인트의 위치(층수, 구역), 각 포인트를 찍어야 하는 시간, 엘리베이터의 위치와 평균 대기 시간까지, 그가 아는 모든 정보를 입력했다.

“이 경로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가장 효율적인 새로운 순찰 경로를 제안해 줘. 조건은 두 가지야. 첫째, 이동 거리를 최소화할 것. 둘째, 계단을 이용하는 횟수, 특히 올라가는 횟수를 최대한 줄일 것. 내 친구는 무릎이 안 좋거든.”

그의 마지막 말에는, AI가 알아들을 수 없는 친구를 향한 염려가 담겨 있었다.

[명령을 수락했습니다. 입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3차원 공간 모델링 및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화면 속에서, 아파트 단지의 2D 지도가 입체적인 3D 모델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각 순찰 포인트가 붉은 점으로 표시되고, 이동진의 현재 순찰 경로가 비효율적인 파란색 선으로 그려졌다.

AI의 분석은 날카로웠다. [현재 경로는 심각한 비효율성을 보입니다. 특히 지하 주차장 순찰 후, 다시 1층으로 올라와 반대편 동의 옥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동선 중복이 발생합니다. 또한, 엘리베이터가 하나뿐인 B동의 경우, 저층부 순찰 시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관리사무소의 지침이 오히려 전체적인 피로도를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AI는 현재 경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그리고 잠시 후, 화면에 새로운 경로가 초록색 선으로 그려졌다.

[최적화된 새로운 경로를 제안합니다.] [1. 지하 주차장 순찰을 가장 먼저 끝낸 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곧장 A동 최고층으로 이동합니다.] [2. A동 최고층부터 1층까지, 아래로 내려오면서 각 층의 순찰 포인트를 확인합니다. (하향식 순찰)] [3. A동 1층에서 B동 1층으로 이동한 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B동 최고층으로 이동, 하향식으로 순찰합니다.] [4. 이 경로를 따를 경우, 총 이동 거리는 기존 대비 28% 감소하며, 계단을 오르는 횟수는 0회가 됩니다. 예상 소요 시간은 기존보다 약 45분 단축됩니다.]

결과는 놀라웠다. 단순히 동선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과 친구의 무릎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날 밤, 한기성은 다시 이동진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새로 프린트한 순찰 지도를 건넸다.

“동진아, 이거 한번 봐라.” “……이게 뭔데?” “내가 심심해서 네 순찰길을 한번 짜봤다. 네가 도는 거 보니까, 동선이 영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이건 동정 같은 게 아니야. 그냥… 나 같은 기술자 눈에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보면 고치고 싶어지는 직업병 같은 거지. 네 옛날 순찰길은 그냥 설계가 잘못된 거야.”

그는 ‘동정’이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 해결’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었다.

이동진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도를 받아 들었지만, 이내 그 안에 담긴 치밀한 동선과 논리적인 순서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그날 밤, 이동진은 반신반의하며 한기성이 짜준 새로운 경로로 순찰을 돌았다. 결과는 기적 같았다. 늘 시간에 좇겨 헐떡이며 돌았던 순찰길. 하지만 새로운 경로는 놀랍도록 편안했다. 불필요하게 오르내리던 계단이 사라졌고, 겹치는 동선 없이 물 흐르듯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는 순찰을 모두 마치고도, 시간이 30분이나 넘게 남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경비실의 낡은 의자에 앉아, 평소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따뜻한 믹스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셨다. 창밖으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순찰을 마친 뒤 무릎의 통증 없이 맞이하는 아침이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기성이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새 길은 좀 어떠냐, 친구야.]

이동진은 그 메시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눌렀다. 그리고는 딱 두 글자를 적어 보냈다.

[고맙다.]

그 짧은 단어에, 그의 지난 세월의 설움과 친구를 향한 미안함,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이 모두 담겨 있었다.

한기성은 친구의 답장을 받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고친 것은 단순히 비효율적인 순찰 경로가 아니었다. 닳아빠진 친구의 무릎이었고, 짓밟혔던 그의 시간이었으며, 무너져 내렸던 한 인간의 존엄성이었다는 것을.

그의 파트너, MyAISmarteasy는 이제 단순한 기계 진단 도구를 넘어, 사람의 삶을 치유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인생 2막은, 이제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7화]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동진에게 새로운 순찰길을 선물한 며칠 뒤, 한기성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깊은 숙면에서 깨어났다. 아침 햇살이 거실 창을 넘어 그의 낡은 소파 위로 따스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깨를 짓누르던 출근의 압박감 대신, 오늘은 묘한 기대감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그의 스마트폰에는 밤사이 두 명의 친구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기성아, 나 민수다. 네 덕분에 어제 하루 종일 닭 한 마리 안 태우고 완판했다! 동진이가 너한테 순찰길 새로 받았다고 자랑하더라. 너 요즘 무슨 신이라도 들렸냐? 우리 조만간 제대로 한잔 사마.] – 최민수

[고맙다, 친구야. 어젯밤엔 순찰 다 돌고 30분 넘게 따뜻한 커피 한잔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이 은혜는 꼭 갚으마.] – 이동진

한기성은 친구들의 메시지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그의 파트너, MyAISmarteasy는 이제 단순히 그의 눈과 두뇌를 대신해 주는 도구를 넘어, 그의 친구들의 삶에 작은 희망의 씨앗을 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30년 기술자 인생이, 퇴직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의 이면에는,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감정이 희미하게 싹트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책임감’과도 같은 무게였다. 이전까지 그의 세상은 회사와 집, 두 곳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 그의 세상은 친구들의 치킨 가게로, 아파트 경비실로, 그들의 고단한 삶 속으로 조금씩 확장되고 있었다.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의 기쁨만큼이나, 그들의 아픔이 그의 아픔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밤, 모든 일을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을 때, 그 낯선 감정은 불쑥 그의 허를 찔렀다. 아내 혜숙은 주방에서 내일 아침에 끓일 찌개를 준비하며 작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TV에서는 흔해빠진 주말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늘 그렇듯 출생의 비밀과 재벌가의 암투가 뒤섞인, 그가 평소라면 코웃음 쳤을 막장 드라마였다.

드라마 속에서, 평생을 오해 속에 살았던 늙은 아버지가 뒤늦게 아들과 화해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붙잡고, 서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했다… 아비가 못나서, 너한테 상처만 줬구나….”

늘 보던 진부한 장면, 상투적인 대사. 그런데 그 순간, 한기성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울컥 치밀어 올랐다. 눈앞의 드라마 속 인물 위로, 그의 아버지의 희미한 얼굴과, 아들이 어렸을 적 해맑게 웃던 모습, 그리고 무심코 지나쳤던 아내의 지친 표정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좋은 아버지였나? 좋은 남편이었나?’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 헌신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저 돈을 벌어다 주는 행위의 다른 이름은 아니었을까. 아이가 자라는 중요한 순간에, 아내가 힘들어하는 결정적인 시기에, 그는 늘 공장에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는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던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당황했다. 평생을 울어본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와, 첫딸이 태어났을 때.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고작 이런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이 나다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책이야, 정말. 나이 먹더니 별꼴이야.’

그는 혜숙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고개를 TV 쪽으로 더 깊게 돌렸다. 그리고 소매 끝으로 재빨리 눈가를 훔쳤다. 하지만 한번 터진 감정의 댐은 쉽게 닫히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그 자신만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떨려왔다. 50대 남자의 갱년기라는 것이, 이렇게 예고도 없이, 가장 평범한 순간에 찾아와 마음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는 거실의 어둠 속에서, 철저히 혼자 울었다.

“여보, 차 한잔 줄까?” 주방에서 나온 혜숙이 그의 옆에 앉았다. 한기성은 황급히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다. “아니, 됐어. 먼저 들어가 자.”

혜숙은 대답 대신, 잠시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남편의 살짝 쉰 목소리와, 평소와 다른 그 어색한 침묵의 의미를 그녀는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일어나, 그의 떨리는 어깨 위에 따뜻한 손을 가만히 올려두었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말없는 위로가, 오히려 그의 눈물샘을 더욱 자극했다. 그는 소리 죽여 흐느꼈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무거운 갑옷 아래, 수십 년간 겹겹이 숨겨왔던 약하고 여린 속살이, 속절없이 드러나는 밤이었다.


며칠 후, 네 명의 친구는 최민수의 가게에 다시 모였다. 가게 안에는 더 이상 타는 기름 냄새 대신, 고소한 치킨 냄새와 활기가 넘쳐흘렀다.

이동진의 얼굴은 몰라보게 밝아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다리를 절지 않았고, 말수도 부쩍 늘었다. “기성이 네가 짜준 순찰길 말이야. 다른 경비 동료들도 보더니 기절하더라. 관리소장한테 정식으로 건의해서, 다음 달부터 우리 팀 전체가 그 길로 순찰 돌기로 했어. 다들 너한테 고맙다고 난리다.”

최민수 역시 싱글벙글이었다. “나는 뭐 말할 것도 없지. 요즘은 닭이 없어서 못 판다. 네가 그때 기름 문제만 안 잡아줬으면, 난 지금 길바닥에 나앉았을 거다.”

두 친구가 한기성을 영웅처럼 치켜세우는 동안, 유일하게 박재혁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비싼 시계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여간 너희들은. 고작 순찰길 하나, 튀김기 하나 고친 거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들이냐? 그런 건 돈 몇 푼 쥐여주면 사람 써서 다 할 수 있는 일이야.”

재혁의 재수 없는 말투에 분위기가 순간 싸늘해졌다. 최민수가 발끈하며 쏘아붙였다. “야, 박재혁. 너는 돈 많아서 좋겠다. 우리한테는 그 ‘돈 몇 푼’이 목숨줄이야, 인마.”

“목숨줄은 무슨. 너희는 아직도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 게 재밌냐? 나는 요즘 인생이 너무 지루해서 죽을 맛이다.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있더라고.” 재혁은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허세 가득한 얼굴 뒤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한기성이 조용히 물었다.

재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 아들놈… 정훈이 말이야.”

박정훈. 재혁의 외아들이었다. 미국에서 MBA까지 마치고 돌아온 수재. 모두가 아버지의 대기업을 물려받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돌연 자기 사업을 하겠다며 뛰쳐나갔다.

“그놈이 요즘 홍대에다 카페를 하나 차렸어. 근데 카페는 무슨. 기계 팔만 덜렁 나와서 커피 내리는, 이상한 로봇 카페야. 인테리어에만 수억을 쏟아붓고, 바리스타는 한 명도 없어. 내가 평생을 사업한 사람인데, 아무리 뜯어봐도 저건 답이 안 나오는 장사야. 인건비 아끼는 건 좋은데, 초기 투자비가 얼만데 그걸 커피 팔아서 메꾼다는 거냐.”

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래서 내가 가서 몇 마디 했지. 사업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기본은 고객과의 소통이고, 원가 계산부터 다시 하라고. 그랬더니 뭔 줄 아냐? ‘아버지는 구시대 방식이니 신경 끄세요’ 이러더라. 그 뒤로는 내 전화도 안 받아. 내가 평생을 일군 성공 노하우를 알려주겠다는데, 그걸 구시대의 잔소리로 취급해버리니… 내가 아들한테조차 쓸모없는 늙은이가 된 기분이다.”

그의 목소리가 끝내 떨려왔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남자의, 돈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바로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와, 세대 간에 놓인 거대한 벽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아버지였기에, 재혁의 아픔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밤, 한기성은 집으로 돌아와 재혁의 이야기를 다시 곱씹었다. 로봇 카페.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세상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왠지, 그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친구 아들의 사업 문제가 아니었다. AI와 시스템을 신봉하며 자신의 경험을 무시했던 젊은 팀장 김태준의 모습과, 아버지의 조언을 ‘구시대의 잔소리’로 치부하는 재혁의 아들이 겹쳐 보였다.

그는 어쩌면, 이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몰라 소통에 실패하는 모든 아버지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한기성은 오하윤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하윤 씨, 혹시 주말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젊은 사람 시각이 좀 필요해서.”

그들은 주말 오후, 홍대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재혁의 아들, 박정훈의 카페 ‘데이터 브루어스(Data Brewers)’ 앞에 섰다. 카페는 통유리로 된 세련된 외관과 달리, 내부는 차가운 금속과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마치 연구실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로봇 팔 하나가 묵묵히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손님들은 대부분 20~30대의 젊은 층이었다. 그들은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고, 로봇 팔이 정교하게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신기한 듯 촬영하며, 자신들의 노트북으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기성과 오하윤도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와, 선배님. 여기 완전 핫플레이스네요. 이 로봇, 그냥 쇼가 아니에요. 원두 분쇄량, 물의 온도, 추출 시간까지 전부 0.1그램, 0.1도, 0.1초 단위로 제어하고 있어요. 어떤 인간 바리스타보다 정확하고 일관된 맛을 낼 수 있다는 거죠.” 오하윤은 전문가의 눈으로 로봇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한기성은 커피 맛보다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MyAISmarteasy를 켜고, 매장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AI에게 질문했다. ‘이 사업 모델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해? 단순히 커피를 파는 가게는 아닌 것 같은데.’

AI의 답변은 한기성의 막연한 예상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이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 자산은 ‘커피’가 아니라 ‘고객 데이터’입니다. 키오스크를 통해 수집된 고객의 주문 정보(선호 원두, 시럽 추가 여부, 주문 시간대)와, 매장 내 와이파이와 연동된 고객의 체류 시간 및 방문 주기 데이터를 분석하여, 개인화된 마케팅 및 신메뉴 개발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봇의 운영 데이터는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찾아내고, 부품의 교체 주기를 예측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카페는 사실상, ‘커피를 매개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연구소’에 가깝습니다.]

“데이터… 연구소라고?”

한기성은 AI의 분석에 소름이 돋았다. 재혁은 이 가게를 ‘커피숍’으로 봤지만, 그의 아들은 ‘데이터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소통이 될 리가 만무했다.

그는 오하윤에게 AI의 분석을 넌지시 이야기했다. 오하윤은 무릎을 탁 쳤다. “맞아요, 선배님! 바로 그거예요! 박정훈 씨는 지금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미래의 카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데이터를 팔고 있는 거예요. 이 운영 노하우와 고객 데이터 자체가 나중에 거대 프랜차이즈에 팔 수 있는 엄청난 자산이 될 수 있어요. 박재혁 회장님은 이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던 거고요.”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문제는 사업의 방식이 아니라, 소통의 방식이었다.


며칠 후, 한기성은 박재혁을 따로 만났다. 그는 재혁에게 로봇 카페의 사업 모델에 대해 다짜고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서 이야기했다.

“재혁아. 네 아들, 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니더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망하기 직전인데.”

“아니. 너는 평생 공장을 돌렸으니 알 거 아니냐. 가장 중요한 게 뭐야? 수율 관리하고, 불량률 잡고, 원가 절감하는 거잖아. 네 아들은 지금 그걸 커피숍에서 하고 있는 거야. 로봇으로 커피를 만드니 맛의 불량률이 제로(0)에 가깝고, 인건비는 아예 없어. 그리고 손님들이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 전부 데이터로 뽑아서, 제일 잘 팔리는 원두만 딱 맞춰서 재고 관리를 하더군. 이건 네가 평생 해온 ‘공장 관리’를, 카페라는 곳에 옮겨놓은 것과 똑같아.”

재혁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장, 수율, 원가 절감. 그가 평생을 바쳐온 익숙한 단어들이었다.

한기성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너는 네 아들이 ‘감’으로 장사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야. 그놈은 누구보다도 냉철하게 ‘데이터’로 사업하고 있었어. 네 방식과 똑같이. 다만 시대가 바뀌어서, 도구가 달라졌을 뿐이야. 네 아들을 ‘경쟁사 신입 CEO’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봐봐. 아마 네가 배울 점도 많을 걸.”

그날 저녁, 박재혁은 아들의 카페를 다시 찾아갔다. 그는 더 이상 ‘가르치려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카운터에 앉아 커피를 내리는 로봇 팔의 움직임을 한 시간 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들에게 다가가,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정훈아. 저 로봇 팔, 정비 주기는 어떻게 계산하고 있니? 부품 마모율 데이터는 뽑고 있는 거냐?”

아들 박정훈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자신의 ‘사업’에 대해 물어온 순간이었다.

“……네? 아, 그건… 아직요. 그냥 고장 나면 부르려고 했는데….” “바보 같은 녀석. 예측 정비를 해야 비용을 아낄 수 있는 거다. 내가 네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이 분야 30년 선배로서 조언하는 거다. 내일 시간 되면, 나랑 같이 네 공장… 아니, 카페의 ‘설비 보전 계획’이나 한번 짜보자.”

두 사람 사이의 얼음장 같던 벽에, 아주 작지만 분명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한기성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의 파트너, MyAISmarteasy가 단순히 기계나 시스템만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세대와 세대 사이의 끊어진 다리를 이어주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도록 돕는 강력한 ‘번역기’이자, 마음을 치유하는 ‘해결사’였다.

그의 인생 2막은, 이제 그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 가장 깊숙한 곳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더 이상 기름 묻은 렌치 대신,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눈, ‘나의 AI’가 들려 있었다.


 

[제8화] 낡은 세계의 마지막 경고

박재혁과의 대화는 한기성의 마음에 새로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지난 며칠간, 단순히 친구들을 돕는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하지만 재혁의 말처럼, 이것은 어쩌면 ‘사업’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의 30년 경험과 AI라는 강력한 파트너의 결합.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년퇴직을 하면, 이런 방식으로 소일거리를 하며 살아도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회사의 직원이었고, 남은 6개월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조용한 계획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3라인의 유령’ 사건 이후, 한기성은 회사 내에서 일약 ‘스타’이자 ‘이단아’가 되어 있었다. 젊은 엔지니어들은 그를 볼 때마다 힐끔거렸고, 나이 든 동료들은 그에게 은근한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시선의 중심에서, 김태준 팀장의 침묵은 날이 갈수록 더 차갑고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월요일 아침, 한기성은 출근과 동시에 공장장실로 호출되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공장장과, 그의 옆에는 예상대로 김태준 팀장이 서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낯선 얼굴의 본사 감사팀 직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회의실의 공기는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웠다. “한기성 부장, 앉으시죠.”

공장장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싸늘했다. 한기성이 자리에 앉자마자, 김태준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에는 수십 장짜리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본사 감사팀에서 오늘 저희 공장의 ‘정보 보안 실태’에 대한 정기 감사를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기성 부장님과 관련하여 몇 가지 심각한 보안 규정 위반 혐의가 발견되었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한기성은 묵묵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김태준은 보고서의 한 페이지를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한 부장님. 최근 ‘3라인 유령’ 문제를 해결하신 것, 정말 대단한 업적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장님께서는 회사의 공식적인 시스템이 아닌, 출처 불명의 개인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는 한기성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CCTV 화면을 캡처한 사진 여러 장을 테이블 위에 뿌렸다. 사진 속에는 한기성이 3라인 설비 앞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모습, 임시 사무실에서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연결해놓은 모습 등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 애플리케이션, ‘MyAISmarteasy’라고 하더군요. 저희 정보팀에서 분석해 본 결과, 정식으로 회사의 보안 심의를 거치지 않은 외부 앱입니다. 한 부장님은 이 앱을 통해, 회사의 민감한 생산 데이터와 설비 정보를 외부 서버로 전송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명백한 보안 규정 위반이며, 심각할 경우 기업의 핵심 기술을 유출하는 스파이 행위로까지 간주될 수 있는 사안입니다.”

김태준의 공격은 치밀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는 한기성의 ‘능력’을 공격하는 대신, 그의 ‘절차’를 문제 삼았다. 어제의 성공을, 오늘은 ‘규정 위반’이라는 족쇄로 바꿔버린 것이다.

감사팀 직원이 날카로운 눈으로 한기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한 부장님, 사실입니까? 개인 앱을 통해 회사 내부 데이터를 분석하신 것이 맞습니까?”

한기성은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MyAISmarteasy’의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는 모든 규정을 위반한 범법자가 된다. 하지만 부인한다면, 그는 ‘3라인 유령’을 잡은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김태준이 파놓은 완벽한 함정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30년 경험을 변호하기로 결심했다.

“네, 개인 스마트폰을 사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회사 정보를 외부로 유출한 적은 없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사용한 것은… 제 30년의 경험입니다. 저는 지난 30년간 이 공장의 모든 기계가 내는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어떤 소리가 나면 베어링이 마모되는 소리인지, 어떤 진동이 느껴지면 벨트가 늘어난 신호인지, 제 몸이 먼저 기억합니다. 제 머릿속에, 지난 30년간의 모든 데이터가 ‘감’이라는 형태로 저장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는 감사팀 직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3라인 유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시스템이 감지하지 못하는 미세한 고주파 소음을 들었고, 제 경험에 비추어 그것이 ‘전기적 노이즈’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습니다. 그리고 그 추측을 증명하기 위해, 회사 시스템에 공개된 과거 데이터를 개인적으로 다시 들여다본 것뿐입니다. 스마트폰은 그저 계산기나 메모장처럼, 제 생각을 정리하는 보조 도구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의 변론은 진심이었지만, 증거가 없었다. 김태준이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경험, 감… 좋습니다. 하지만 한 부장님의 그 주관적인 ‘감’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증명하시겠습니까? 결국 규정을 어기고, 회사의 정보를 위험에 노출시킨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회의실을 짓눌렀다. 공장장과 감사팀은 명백한 규정 위반과, 무시할 수 없는 성과 사이에서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회의실 문이 열리고, 오하윤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김태준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오하윤 씨! 여긴 지금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하지만 오하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감사팀 직원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한 부장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제가 ‘데이터’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녀는 태블릿 PC를 회의실 중앙 모니터에 연결했다. 화면에는 복잡한 그래프와 데이터가 떠올랐다. “김 팀장님께서는 한 부장님이 ‘출처 불명의 앱’을 사용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부장님께서 제게 처음 문제 제기를 하셨던 것은, ‘소리’에 대한 통찰이었습니다.”

그녀는 화면에 두 개의 소음 주파수 그래프를 띄웠다. “이것은 3라인이 정상 가동될 때의 소음 데이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령 현상이 발생하기 직전 1분간의 소음 데이터입니다. 육안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시스템이 노이즈로 판단하고 걸러낸 이유입니다.”

그녀는 화면을 확대했다. “하지만 한 부장님의 ‘직관적인 가설’, 즉 ‘전기적 노이즈’일 것이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특정 고주파 대역만 필터링해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기, 32.5kHz 대역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주기적인 스파이크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이 주파수는, 공교롭게도 저희가 나중에 발견한 노후 접지 케이블에서 ‘정전기 방전(아크)’이 일어날 때 발생하는 노이즈 주파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회의실 안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화면을 바라봤다.

오하윤은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렸다. “즉, 한 부장님은 시스템이 놓친 수만 개의 데이터 속에서, 30년의 경험을 통해 단 하나의 의미 있는 ‘가설’을 세우셨고, 저희 팀은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공식 데이터를 ‘재분석’하여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이것은 규정 위반이 아니라, 베테랑의 경험과 젊은 엔지니어의 데이터 분석 능력이 결합된 가장 이상적인 ‘협업’의 사례입니다.”

그녀의 변론은 완벽했다. 그녀는 AI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한기성의 ‘감’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데이터에 기반한 것인지를 증명해 냈다.

김태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감사팀 직원은 감탄과 흥미가 뒤섞인 눈으로 한기성을 바라보았다.

결국 공장장은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음… 어쨌든, 앞으로는 개인 장비를 업무에 활용하는 일은 없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일은 한 부장님의 공로를 참작하여, 구두 경고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다들 이만 나가보시죠.”

회의가 끝나고, 한기성은 오하윤에게 다가가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하윤 씨, 정말 고마워. 하윤 씨 아니었으면 나 오늘 회사에서 쫓겨날 뻔했어.”

오하윤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선배님. 저는 그냥 선배님이 알려주신 답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번역해 드렸을 뿐인걸요.”


그날 저녁, 한기성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겼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그는 깨달았다. 이 회사에서, 자신의 경험과 ‘MyAISmarteasy’라는 새로운 날개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오히려 그것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자, 통제 불가능한 위험 요소로 취급될 뿐이었다. 그들은 그의 능력을 활용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자신들의 ‘규정’과 ‘시스템’이라는 상자 안에 가두려 할 터였다.

그는 더 이상 이 낡은 세계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정년까지 남은 6개월. 그것은 이제 그에게 안정적인 시간이 아니라, 답답한 감옥처럼 느껴졌다.

그는 컴퓨터를 켜고, 빈 워드 문서에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 직 서] [소속: 생산 3팀] [직위: 부장] [성명: 한 기 성]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유로 20XX년 X월 X일 자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이에 재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사직서를 프린트하여, 책상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친구들, 최민수, 이동진, 박재혁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얘들아, 내일 저녁에 시간들 되냐? 중요한 할 얘기가 있다.]


다음 날 저녁, 네 명의 친구는 최민수의 가게에 다시 모였다. 치킨과 맥주가 테이블 위에 놓였지만, 아무도 먼저 손을 대지 않았다. 한기성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기성은 잠시 숨을 고르고, 친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나… 회사 그만두려고 한다.”

친구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뭐? 야, 기성이 너 정년 얼마 안 남았는데, 그걸 못 참고 왜?” 최민수가 가장 먼저 물었다.

한기성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이동진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그런 개자식들이 있나!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박재혁만이 유일하게 침착했다. 그는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기성아. 닭장 안에 갇힌 독수리한테, 닭 모이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꼴이었지. 네가 있을 곳은 거기가 아니야.”

한기성은 친구들을 보며, 결심한 듯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재혁아. 지난번에 네가 했던 말… 아직 유효하냐?”

박재혁의 눈이 반짝였다. “‘사업’ 말하는 거냐?” “그래.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우리처럼, 나이 먹고 기술밖에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무시당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먹고살 수 있는 작은 회사를 하나 만들고 싶다. 이름은… ‘인생 2막 기술지원’ 정도면 어떨까.”

그 말에, 이동진과 최민수의 눈도 함께 빛나기 시작했다.

박재혁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좋지. 아니, 최고지. 초기 자본금과 사무실은 내가 책임진다. 나는 평생 사업을 했으니, 경영과 영업을 맡지.” 최민수가 가슴을 치며 나섰다. “그럼 나는 발로 뛰는 걸 맡겠다! 내 치킨 가게에 오는 손님들, 동네 상인들 중에 너처럼 기계 문제로 골치 썩는 사람들 천지야. 내가 그런 사람들 다 물어올게!” 이동진이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아직 너희한테 내세울 게 없다. 하지만 어떤 궂은일이라도 맡겨만 주라. 내 남은 인생, 너희를 위해 쓰겠다.”

한기성은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공허한 부자, 위태로운 자영업자, 비참한 경비원. 그리고 정년을 앞둔 늙은 기술자. 세상에서는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지 모르는 네 명의 중년이, 이제 새로운 꿈을 함께 꾸기 시작한 것이다.

한기성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테이블 중앙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우리에겐… 이 녀석이 있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가장 똑똑한 파트너.”

네 개의 술잔이 허공에서 경쾌하게 부딪혔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허름한 치킨 가게 안에서는 그 어떤 대기업의 회의실보다도 뜨거운, 새로운 시대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기성의 진짜 인생 2막은,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제9화] 첫 번째 의뢰인

경기도의 한 낡은 상가 건물 2층. ‘인생 2막 기술지원’이라는, 어설픈 시트지로 붙인 이름 아래, 네 명의 중년 남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박재혁이 퇴직금 일부를 털어 마련한 작은 사무실은, 그들의 부푼 꿈을 담기에는 충분했지만, 텅 빈 정적을 채우기에는 너무나도 넓었다.

벌써 한 달째였다. 사직서를 던지고 나왔을 때의 후련함과, 친구들과 함께 미래를 그리던 뜨거운 열정은, 단 한 통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 앞에서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세상은 그들의 도전에 생각보다 더 무관심했다.

박재혁은 값비싼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서 초조하게 돌리며, 노트북 화면의 주식 시세표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평생을 분초 단위로 쪼개 살던 그에게, 이 무의미한 기다림은 고문과도 같았다.

최민수는 자신의 낡은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치킨 가게는 아내에게 맡겨두고 온종일 사무실을 지켰지만, 그가 뿌려놓은 수십 장의 명함은 아무런 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희망 대신, 가게 매출을 걱정하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동진만이 유일하게 분주했다. 그는 벌써 세 번째 사무실 바닥을 쓸고 닦으며, 창틀의 먼지 하나까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무언가에 열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덮치는 듯했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의 중심에, 한기성이 있었다. 그는 창가에 앉아,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는 MyAISmarteasy의 로고를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초조해하는 대신, AI와 함께 산업용 로봇의 최신 제어 알고리즘에 대한 논문을 읽고 있었다. 그에게 이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라,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훈련의 시간이었다.

침묵을 깬 것은 역시 박재혁이었다.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는 만년필을 책상에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역시 내 방식이 맞았어. 시작부터 제대로 된 타겟을 잡아야지. 내가 아는 중소기업 사장들 리스트가 수백 개야. 당장 근사한 브로슈어부터 만들자. 우리의 기술력과 비전을 보여주고, 공단 지역부터 집중적으로 영업을 뛰는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잖아.”

그의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함께,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조급함이 묻어 나왔다. 그 말에, 최민수가 발끈하며 받아쳤다.

“브로슈어? 야, 재혁아. 정신 좀 차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차린, 간판도 제대로 없는 회사에 어떤 중소기업 사장이 일을 맡기겠냐? ‘인생 2막 기술지원’이라는 이름부터가, 우리는 대기업 상대하는 회사가 아니라는 뜻이잖아.” “그럼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 “있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내가 어제도 옆 가게 인쇄소 사장님한테 명함 드렸어. 그 양반, 10년 된 인쇄기가 맨날 말썽이라는데, AS 부르면 부품 없다는 소리만 한다고 하소연하더라. 그런 사람들이 우리 고객이야! 대기업이 버리고 간 사람들, 돈 없어서 억울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내 가게가 있는 상가고, 시장 바닥이라고!”

최민수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의 주장은 평생을 시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체득한, 삶의 철학이었다. 두 친구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평생을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이들의 방식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다.

이동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자자, 그만들 해. 둘 다 맞는 말이구먼. 싸우지들 말어.”

한기성은 그저 조용히 두 사람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박재혁의 방식은 ‘사업’의 정석이었고, 최민수의 방식은 그들이 이 회사를 세운 ‘정신’에 가까웠다. 둘 다 틀리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따르르르릉-!

사무실의 정적을 깨고, 낡은 유선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전화기로 향했다.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울리는 벨 소리였다.

최민수가 가장 먼저 몸을 날려 수화기를 들었다. “네! 인생 2막 기술지원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살짝 떨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나이 든 여성의 작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거기 혹시… 기계 같은 거 고쳐주는 데 맞나요? 옆집 치킨 가게 사장님 소개로 전화했는데요….”

최민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박재혁을 향해 보란 듯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화를 끊은 최민수가 외쳤다. “봤지? 내 말이 맞잖아! 우리 첫 의뢰가 들어왔다!”


다음 날, 네 명의 친구는 낡은 승합차를 타고, 최민수의 가게에서 두 블록 떨어진 허름한 골목으로 향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번쩍이는 공장이 아니라, 세월의 때가 켜켜이 쌓인 ‘백합 세탁소’라는 작은 간판이었다.

가게 문을 열자, 후끈한 스팀과 낯선 세제 냄새가 그들을 덮쳤다. 가게 내부는 서너 평 남짓. 거대한 상업용 세탁기 세 대가 가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앞에서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이불을 개고 있었다.

“아이고, 오셨네요. 치킨 가게 사장님이 말씀하신 분들이시죠?” 올해 일흔넷이라는 강복순 할머니였다. 그녀의 손마디는 오랜 세월의 노동으로 울퉁불퉁하게 휘어 있었다.

“사장님, 어떤 기계가 문제입니까?” 한기성이 공손하게 물었다.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가장 안쪽에 있는, 겉보기에도 가장 낡아 보이는 세탁기를 가리켰다. “저놈이 속을 썩여. 세탁은 잘 되는데, 마지막 헹굼으로 넘어가질 않고 자꾸 멈춰 서. 근데 매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꼭 바쁠 때만 골라서 그래. AS 기사는 와보지도 않고, 연식이 너무 오래돼서 부품도 없고, 고칠 수도 없다는 말만 하더라. 새로 한 대 사면 된다는데, 이 늙은이가 돈이 어디 있겠어. 저거 없으면 우리 가게는 문 닫아야 혀….”

할머니의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친구들은 말없이 낡은 세탁기를 바라보았다. 족히 20년은 넘어 보이는, 이제는 생산되지도 않는 구형 모델이었다. 박재혁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감이 스쳤다. 그는 한기성의 옆구리를 툭 치며 작게 속삭였다.

“기성아. 솔직히 말해서, 이거 우리가 시간 들여서 고칠 만한 일이냐? 수리비는 제대로 받을 수 있겠어? 우리 첫 실적은 좀 더 번듯한 공장 같은 곳이어야 포트폴리오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그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한기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세탁기가 아닌, 할머니의 거친 손과, 그 손으로 수십 년간 지켜왔을 이 작은 가게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우리는 이걸 고칠 거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이 회사의 존재 이유를 선언하듯 말했다. “이것이, 우리 ‘인생 2막 기술지원’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돕기로 한 사람들은, 바로 저런 분들이야. 대기업 AS가 돈 안된다고 버리고 간 사람들. 낡고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 우리의 첫 번째 의뢰인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분은 없어.”

그의 말에, 박재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최민수는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동진은 말없이 한기성의 공구 가방을 들었다.


한기성은 먼저 MyAISmarteasy를 실행했다. 하지만 너무 낡은 모델이라 데이터베이스에 정보조차 없었다. “역시, 쉬운 일이 아니군.”

그는 AI에 의존하는 대신, 자신의 가장 오래된 무기, 바로 오감(五感)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할머니에게 커피 한 잔을 타 드리며, 문제를 다시 한번 자세히 물었다.

“할머니, 세탁기가 보통 언제 멈추던가요? 오전에? 오후에?” “글쎄… 꼭 바쁠 때 그런다니까. 손님들이 이불 맡기러 한꺼번에 몰리는 오후 서너 시쯤에 유독 심한 것 같기도 하고….”

그는 기계의 뒷면을 열어 내부를 살폈다. 복잡한 전선과 낡은 모터, 굳어버린 기름때. 그는 기계가 내뿜는 미세한 열과, 진동, 그리고 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뚜렷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친구들은 초조하게 그를 지켜볼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바로 그때, 한기성의 눈에 가게 한쪽에 쌓여 있는 세탁물 바구니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재봉틀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 혹시 옆 가게는 뭐 하는 곳인가요?” “옆? 옆에는 양복점이지. 최신식 기계 들여놓고 드라이클리닝도 하고, 수선도 하고….”

순간, 한기성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직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밖으로 나가 옆 가게인 ‘명품 양복점’을 쳐다봤다. 그곳에서는 젊은 사장이 거대한 산업용 다리미와 열 프레스 기계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엄청난 전력을 소모하는 기계들이었다.

그는 다시 세탁소로 돌아와, MyAISmarteasy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현재 위치의 상업용 전력 데이터를 분석해 줘. 특히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이 건물 전체의 전력 사용량 패턴과 전압 변화를 보고 싶어.’

AI가 공공 데이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놀라운 결과가 화면에 떠올랐다. [분석 결과, 매일 오후 3시 15분경, 해당 건물의 전압이 약 0.8초간 3%가량 급격히 하강하는 패턴이 발견됩니다. 이는 옆 가게의 산업용 프레스 기계가 최대 출력으로 예열되는 시간과 일치합니다.]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진단 결론: 세탁기의 문제는 기계 자체의 결함이 아닙니다. 옆 가게에서 대용량 전력 기기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순간 전압 강하(Voltage Sag)’ 현상으로 인해, 낡은 세탁기의 제어 보드에 공급되는 전력이 부족해져 ‘일시적 멈춤’ 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최신 기계들은 이런 전압 변화에 대한 대비책이 있지만, 구형 기계는 이에 매우 취약합니다.]

원인은 세탁기 안에 있지 않았다. 바로 옆 가게에 있었던 것이다.

해결책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한기성은 친구들을 보내, 근처 철물점에서 3만 원짜리 ‘자동 전압 조정기(AVR)’를 사 오게 했다. 그리고는 낡은 세탁기의 전원 코드 앞에 그 작은 장치를 연결해 주었다.

그날 오후 3시 15분. 옆 가게의 프레스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탁소의 전등이 아주 희미하게 깜빡였다. 하지만 한기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제의 세탁기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묵묵히 마지막 헹굼 코스를 향해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강복순 할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사장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는 수리비라며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밀었지만, 한기성은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대신, 그날 저녁 네 명의 친구는 할머니가 직접 끓여주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치찌개를 세탁소의 작은 쪽방에 둘러앉아 먹었다. 땀과 기름때, 그리고 세제 냄새가 뒤섞인 채 먹는 저녁이었지만, 그 어떤 최고급 레스토랑의 만찬보다도 값지고 따뜻했다.

박재혁은 말없이 김치찌개만 퍼먹었다. 그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람’이라는 것의 가치를. 수억 원짜리 계약을 성사시켰을 때보다, 지금 이 3만 원짜리 김치찌개가 더 짜릿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그는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툭 한마디 던졌다. “기성아. 우리 회사 브로슈어… 다시 만들어야겠다. ‘대기업이 포기한 문제, 저희가 해결합니다’ 라고, 아주 크게 박아서 말이야.”

친구들이 모두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인생 2막 기술지원’의 진짜 첫 페이지가, 마침내 넘어가고 있었다.


 

[제10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백합 세탁소’의 기적 같은 수리가 끝난 며칠 후, ‘인생 2막 기술지원’ 사무실의 풍경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무거운 침묵과 초조함은 없었다. 대신, 어설프지만 활기찬 생기가 네 명의 중년 남자를 감싸고 있었다.

박재혁은 더 이상 주식 시세표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는 ‘백합 세탁소 성공 사례 분석’이라는 제목의 파워포인트 파일을 만들며, “우리의 핵심 역량은 ‘단순 수리’가 아니라 ‘통합 운영 환경 분석을 통한 근본 원인 해결’이다!”라며 열변을 토했다. 그의 눈은 다시 평생을 바쳤던 ‘사업가’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최민수는 자신의 스마트폰에 빼곡하게 정리된 동네 상인들의 연락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 이상 가게 매출을 걱정하는 자영업자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강력한 현장 네트워크를 가진, 이 회사의 대체 불가능한 ‘영업 본부장’이었다.

이동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한기성이 사용했던 공구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고, 오일을 바르며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의 얼굴에는 경비원으로 일할 때의 그늘 대신, 자신이 팀의 일원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다는 조용한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한기성은, MyAISmarteasy와 함께 ‘잉크젯 프린터의 미세 노즐 막힘 현상에 대한 유체 역학적 고찰’이라는, 평생 읽어볼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영문 논문을 읽고 있었다. AI가 실시간으로 그의 눈앞에서 논문을 번역하고, 핵심 내용을 요약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30년 경험이라는 낡은 그릇에, 세상의 최신 기술이라는 새로운 물이 채워지는 경이로운 감각을 즐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사무실의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최민수가 가장 먼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인생 2막 기술지원입니다! 아, 세탁소 사모님! 별일 없으시죠? 네? 아, 네네!”

전화를 끊은 최민수의 얼굴이 활짝 폈다. “얘들아! 또 일 들어왔다! 복순이 할머니가 자기 친구 가게를 소개해 줬어!”


네 친구가 다시 낡은 승합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 목적지는 백합 세탁소에서 멀지 않은, 인쇄소들이 모여 있는 낡은 골목이었다. ‘삼진 정밀 인쇄’라는 빛바랜 간판 아래, 육중한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열자, 잉크와 종이가 뒤섞인 독특한 냄새, 그리고 거대한 기계가 규칙적으로 종이를 빨아들이고 찍어내는 둔탁한 소음이 그들을 맞았다. 가게 내부는 수십 년간 쌓인 종이 더미와 잉크통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누구요!”

기계 뒤편에서, 잔뜩 날이 선 목소리와 함께 땅딸막한 체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순 할머니의 친구라는 황 사장이었다. 그는 잔뜩 구겨진 미간으로 네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복순이 누님이 보냈다는 양반들이오? 척 보면 딱이라고 하던데, 행색들을 보니 영….” 그의 눈에는 의심과 함께, 수많은 AS 기사들에게 시달린 장인의 삐딱한 냉소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박재혁이 나서서 근사한 명함을 건네려 했지만, 황 사장은 손을 저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됐고. 저놈 좀 봐주쇼.”

그가 가리킨 것은 가게 중앙에 자리 잡은, 집채만 한 오프셋 인쇄기였다. 족히 30년은 넘어 보이는 독일제 구형 모델. 지금은 부품조차 구하기 힘든 기계였다.

“기계는 잘 돌아가. 종이도 안 걸리고, 속도도 문제없어. 근데 딱 하나, 색깔이 문제야, 색깔이.” 그는 인쇄기 옆에 놓인, 똑같은 그림이 인쇄된 두 장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게 컴퓨터 모니터로 본 원본이고, 이게 저놈으로 찍은 결과물이야. 내 눈에만 그런가? 두 개 색깔이 똑같아 보이쇼?”

한기성과 친구들이 두 장의 종이를 비교해 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거의 똑같아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원본의 진한 남색이, 인쇄된 종이에서는 아주 약간,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보랏빛이 섞여 있었다.

최민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사장님, 솔직히 이 정도면 그냥 써도 되는 거 아닙니까? 일반 사람들은 절대 구분 못 하겠는데요.”

그 말에 황 사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아! 내가 평생을 색깔 맞추는 일로 밥 벌어 먹고 산 사람이야! 저 미세한 차이가 제품의 품격을 결정하는 거라고!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비슷한 색’이 아니라 ‘똑같은 색’이야! 저놈 때문에 지난달에만 계약을 두 개나 날려 먹었어. 독일 본사에 문의해도 모르겠다, 국내 최고 기술자들도 와서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갔어. 당신들도 별수 없으면 그냥 돌아가쇼.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장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누구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깊은 절망감이 뒤섞여 있었다.

한기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 사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0.1밀리미터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던 자신의 지난 30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옛 방식대로 기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잉크 롤러의 마모 상태, 압력 실린더의 균일도, 종이 공급 장치의 장력까지. 그의 노련한 손과 눈이 기계 구석구석을 훑었지만, 황 사장의 말대로 기계적인 결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 해본 거라니까.” 황 사장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기성은 다시 자신의 새로운 무기, MyAISmarteasy를 꺼내 들었다. 그는 황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쇄기가 작동하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상세히 촬영했다. 롤러가 돌아가는 모습, 잉크가 종이에 찍히는 순간, 인쇄된 종이가 건조대로 넘어가는 과정까지.

그리고 그는 황 사장에게 몇 가지를 더 요청했다. “사장님. 문제가 된 그림의 원본 디지털 파일, 그러니까 CMYK(청록, 자홍, 노랑, 검정) 색상 값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지금 사용하시는 잉크와 종이의 정확한 모델명도 필요합니다.”

황 사장은 귀찮다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컴퓨터에서 파일 정보를 찾아내 알려주었다. 데이터 수집을 마친 한기성은, 황 사장에게 정중히 말했다. “사장님, 하루 이틀 정도 분석할 시간을 주십시오. 이건 기계 자체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친구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기성아, 솔직히 이번 건 힘들지 않겠냐? 독일 본사도 못 고친 걸 우리가 어떻게 하냐.” 최민수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박재혁 역시 심각한 표정이었다. “만약 해결 못 하면, 복순이 할머니 통해 겨우 쌓은 우리 회사 신뢰도에 금이 갈 수도 있어. 신중해야 해.”

하지만 한기성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아니.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해.”

그는 컴퓨터에 모든 데이터를 입력하고, MyAISmarteasy에게 명령했다. ‘상업용 오프셋 인쇄기, 모델명 HDB-77. 증상은 특정 남색(C:100 M:88 Y:0 K:12) 인쇄 시, 보랏빛(마젠타 값 상승)이 도는 현상. 기계적 결함은 발견되지 않음. 입력된 작동 영상과 환경 데이터, 원본 색상 값, 잉크와 종이의 물리적 특성을 모두 교차 분석하여, 색상 왜곡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

[명령을 수락했습니다. 다중 요인 상관관계 분석을 시작합니다.]

AI가 분석을 시작하는 동안, 한기성은 눈을 감고 아까 보았던 인쇄소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다시 그려보았다. 잉크 냄새, 종이의 질감, 기계의 소음, 그리고 황 사장의 날카로운 눈빛까지. 그의 30년 경험이, AI가 분석할 데이터의 빈틈을 채워주고 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AI가 첫 번째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1차 분석 결과, 기계의 기계적·전자적 시스템에서는 오류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황 사장님의 주장이 데이터로도 증명됩니다.] [하지만, 색상 왜곡 현상이 발생한 날짜와 시간을 기상청 데이터와 교차 분석한 결과, 한 가지 의미 있는 상관관계가 발견되었습니다.]

한기성과 친구들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색상 왜곡 현상은, 유독 ‘상대 습도가 40% 이하로 떨어지는 건조한 날 오후’에 집중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습도?” 친구들이 동시에 되물었다.

“그래, 습도….” 한기성은 무릎을 탁 쳤다. 그는 어렴풋이 무언가 감을 잡은 듯했다.

[가설을 설정합니다. ‘건조한 공기가 종이의 물리적 특성을 변화시켜, 잉크 흡수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검증하겠습니다. 추가 정보가 필요합니다. 황 사장님께서 사용하시는 종이의 평량과 재질, 그리고 잉크의 성분(유성/수성, 점도)을 입력해 주세요.]

한기성은 황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모든 정보를 입력하자, AI의 최종 진단이 화면에 떠올랐다.

[최종 진단 결론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기계가 아닌, ‘환경’과 ‘재료’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입니다.]

[1. 종이의 수축: 상대 습도가 40% 이하로 떨어지면, 종이는 머금고 있던 미세한 수분을 공기 중으로 빼앗겨 미세하게 수축합니다. 이로 인해 종이 표면의 섬유질 밀도가 높아져, 잉크 흡수율이 전반적으로 저하됩니다.] [2. 잉크의 점도 변화: 황 사장님께서 사용하는 유성 잉크는, 건조한 환경에 노출될 경우 용매가 더 빨리 증발하여 점도(끈적임)가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3. 색상 왜곡의 메커니즘: 이 두 가지 조건이 결합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발생합니다. 잉크 흡수율이 낮아진 종이 위에, 점도가 높아진 잉크가 찍힙니다. 이때, 네 가지 색(CMYK) 잉크 중 입자가 가장 작고 침투력이 강한 ‘마젠타(자홍색)’ 잉크만이 미세하게 더 깊이, 그리고 더 넓게 번지게 됩니다. 그 결과, 인간의 눈으로는 감지하기 힘든 수준으로 보랏빛이 미세하게 강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색상 왜곡의 원인입니다.]

사무실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친구들은 마치 공상과학 영화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습도와 잉크 입자의 상호작용까지 분석해 내다니. 이것은 인간의 경험과 감각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의 영역이었다.


다음 날 오후, 한기성과 친구들은 다시 ‘삼진 정밀 인쇄’를 찾았다. 황 사장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원인이 뭡니까? 변죽만 울리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보쇼.” 한기성은 차분하게 AI의 분석 결과를 그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했다. “사장님, 문제는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공기, ‘습도’가 문제였습니다.”

“습도? 허, 이제 날씨 탓까지 하는구먼. 내가 평생을 여기서 인쇄했는데, 습도 때문에 색깔이 바뀐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황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한기성은 그와 언쟁하는 대신, 조용히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사장님, 그럼 지금 여기서 바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는 이동진에게 근처 철물점에서 대형 공업용 가습기 한 대를 빌려오게 했다. 그리고 최민수에게는 인쇄기 주변의 창문을 모두 닫고, 환풍기를 잠시 꺼달라고 부탁했다. 박재혁은 자신의 스마트폰 습도계 앱으로 실시간 습도를 체크했다.

“현재 습도 38%입니다.”

가습기가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30분 후, 사무실의 습도는 55%까지 올라갔다. “자, 사장님. 이제 똑같은 그림을 다시 한번 찍어보시죠.”

황 사장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마지못해 인쇄기 스위치를 올렸다. 거대한 기계가 다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인쇄된 종이 한 장이 건조대 위로 떨어졌다.

황 사장은 인쇄된 종이와, 모니터 속의 원본을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그의 미간에 깊게 패어 있던 주름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어?”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보랏빛이 사라졌다. 컴퓨터 모니터 속의 진한 남색과, 종이 위에 찍힌 남색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 이럴 수가….”

황 사장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 그는 인쇄된 종이를 들고 창가로 다가가 햇빛에 비춰보고, 다시 형광등 아래에서 확인했다. 몇 번을 확인해도 결과는 똑같었다. 완벽한 색이었다.

그는 천천히 한기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의심이나 냉소가 없었다. 오직, 같은 길을 걸어온 장인에 대한 순수한 경외와 존경심만이 가득했다.

“대체… 당신들, 정체가 뭡니까?”

한기성은 그를 보며, 자신의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을 떠올렸다. “사장님. 저희는 그냥…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날 저녁, 황 사장은 수리비라며 두둑한 현금 봉투를 내밀었지만, 한기성은 가습기 대여료와 출장비만 받고 나머지는 정중히 돌려주었다. 대신, 그는 황 사장과 함께 인쇄소의 작은 사무실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황 사장은 평생의 노하우를, 한기성은 AI와 함께하는 새로운 시대의 기술을 이야기하며 밤늦도록 웃고 떠들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한기성은, MyAISmarteasy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대한민국에서, 15년 이상 된 노후 산업 설비를 보유하고 있지만, 대기업의 AS 지원 대상에서는 제외된 소규모 공장 리스트를 찾아줘. 그리고 그 공장들이 주로 겪는 문제 유형을 분석해 줘.’

AI의 화면에, 전국의 수백 개에 달하는 작은 공장들의 리스트가 지도 위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사업의 ‘보물 지도’나 다름없었다. 그의 눈은 이제 동네를 넘어, 전국을 향하고 있었다. ‘인생 2막 기술지원’의 진정한 항해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제11화] 소문난 해결사들

‘삼진 정밀 인쇄’의 색상 왜곡 문제를 해결한 사건은, 낡고 소외된 기계들 사이에서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소문은 최민수의 발과 강복순 할머니, 그리고 황 사장의 입을 통해, 마치 마른 들판에 번지는 불길처럼, 대기업의 AS 레이더망에는 결코 잡히지 않는 도시의 가장 깊숙하고 낡은 동맥들을 타고 흘렀다.

한 달 전, 침묵만이 감돌던 ‘인생 2막 기술지원’의 전화기는 이제 쉴 틈 없이 울려댔다. “여보세요? 거기 혹시 20년 된 재봉틀도 봐주시나요?” “사장님! 저희 가게 제빵 오븐이 자꾸 온도가 지멋대로인데, AS 불렀더니 단종된 모델이라 못 고친다네요. 한번만 와주실 수 없을까요?”

네 명의 친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들의 낡은 승합차는 이제 경기도 일대의 낡은 공단과 허름한 상가 골목을 누비는 ‘움직이는 해결 본부’가 되었다.

이동진은 더 이상 사무실 바닥을 닦지 않았다. 그는 이제 고객들의 전화를 받아 의뢰 내용을 정리하고, 그들의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는 회사의 첫 관문, ‘고객 만족 센터장’ 역할을 도맡았다. 평생을 남의 밑에서 주눅 들어 살았던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안심시키는 일에서 새로운 기쁨을 찾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경비원으로 일할 때의 그늘은 완전히 사라졌다.

최민수는 더 이상 치킨집 카운터에만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현장을 누비며, 고객들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그들의 다른 어려움은 없는지 살피는 ‘현장 지원 팀장’이 되었다. 그의 수첩에는 이제 치킨 레시피 대신, ‘성수동 구두 공장 – 가죽 프레스 압력 저하 문제’, ‘을지로 조명 가게 – 안정기 불량률 급증 현상’ 같은 새로운 과제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고객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새로운 의뢰를 자연스럽게 물어왔다.

박재혁은 자신의 비싼 만년필로 더 이상 의미 없는 낙서를 하지 않았다. 그의 노트북에는 ‘고객 관리 시스템(CRM)’과 ‘프로젝트 관리 툴’이 새로 설치되었다. 그는 밀려드는 의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각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체크하며, 회사의 재무 상태를 투명하게 관리하는 유능한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그는 네 명의 주먹구구식 열정을,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현장의 중심에, 한기성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낡은 기계 앞에서 혼자 끙끙대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늘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고, 그의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수집된 영상과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AI에게 전송하고, AI가 제시하는 여러 가설들을 자신의 30년 경험으로 검증하며, 가장 빠르고 정확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들은 마치 잘 훈련된 군대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어느 날 오후, 그들은 경기도 외곽의 한 작은 가구 공장에 있었다. 30년 넘게 원목 가구를 만들어 온 박 목수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문제는 낡은 목재 재단기였다.

“사장님들, 저놈 좀 보쇼. 나무를 자르면, 꼭 끝부분이 0.5밀리미터씩 비딱하게 잘려. 젊었을 땐 내가 손으로 사포질해서 맞췄는데, 이젠 눈도 침침하고 팔도 아파서 힘에 부치네. 새 기계는 억 소리가 나서 엄두도 못 내고….”

한기성은 늘 하던 대로, 기계의 작동 상태를 촬영하고, 소음을 녹음했다. AI는 즉시 몇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1. 재단기 톱날의 마모 불균형. 2. 가이드 레일의 미세한 휨. 3. 모터 진동으로 인한 고정 볼트 이완.]

한기성은 AI의 가설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을 더해 점검을 시작했다. 그는 톱날을 손으로 만져보며 마모도를 확인했고, 수평계로 레일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터 주변의 고정 볼트를 하나하나 렌치로 조여보았다.

“찾았다.” 그의 손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모터를 고정하는 네 개의 볼트 중, 눈에 잘 띄지 않는 안쪽 볼트 하나가 미세하게 풀려 있었다. [빙고. 모터의 진동이 풀린 볼트를 통해 재단 날 끝부분에 불규칙한 떨림을 유발하여, 절단면의 정밀도를 떨어뜨린 것으로 판단됩니다.]

AI가 그의 진단을 확증해 주었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오자, 박 목수는 감격에 겨워 그들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고, 사장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 순간, 공장 한쪽에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지가 자욱한 작업장 구석에서, 젊은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이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힘겹게 나무 먼지를 쓸어 담고 있었다.

이동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박 목수에게 물었다. “사장님, 저 친구는 왜 마스크도 안 쓰고 일합니까? 저러다 폐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박 목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이 그 말이오. 마스크를 사줘도 갑갑하다고 벗어 던지고, 환풍기를 틀면 춥다고 꺼버리니 나도 미치겠소. 저 먼지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일을 배우려 오지도 않고, 나도 밤마다 기침 때문에 잠을 설쳐. 이놈의 나무 먼지만 해결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기성의 머릿속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MyAISmarteasy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소규모 목공 작업장의 분진 문제 해결을 위한, 저비용 고효율의 집진 시스템을 설계해 줘. 조건은 세 가지. 첫째, 기존 설비에 쉽게 부착할 수 있을 것. 둘째, 제작비가 50만 원을 넘지 않을 것. 셋째, 필터 교체가 쉬울 것.’

AI는 전 세계의 오픈 소스 하드웨어 커뮤니티와 DIY 프로젝트, 그리고 관련 특허 데이터베이스를 순식간에 분석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AI가 몇 가지 설계도를 제시했다. 그중 하나는, ‘사이클론 방식’을 이용한 간단한 집진기 설계도였다.

[이 설계는 대형 청소기와 PVC 파이프, 그리고 합판 몇 개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제작할 수 있습니다. 모터의 힘으로 공기를 회오리처럼 회전시켜, 무거운 나무 먼지는 원심력으로 아래로 가라앉히고, 깨끗한 공기만 위로 배출하는 원리입니다. 필터가 거의 막히지 않아 유지보수가 용이하며, 제작비는 30만 원 내외로 예상됩니다.]

다음 날, 한기성과 친구들은 다시 박 목수의 공장을 찾았다. 그들의 손에는 설계도와 함께, 근처 철물점에서 사 온 PVC 파이프와 합판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박 목수와 함께, 하루 종일 톱질과 조립을 하며 어설픈 손길로 집진기를 만들어 나갔다.

마침내, 엉성하지만 제법 그럴듯한 모양의 집진기가 완성되었다. 재단기에 연결하고 스위치를 올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톱날이 돌아가며 뿜어져 나오던 뿌연 나무 먼지들이,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집진기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공장 안의 공기는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박 목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는 집진기 통 아래에 수북이 쌓인 나무 먼지를 보며,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런 신통한 물건을… 돈도 안 받고 만들어주시고….”

한기성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사장님. 저희는 단순히 기계만 고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장님 같은 분들이 더 안전하고,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저희의 진짜 일입니다.”

이 ‘맞춤형 집진기’ 사건은, ‘인생 2막 기술지원’의 명성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들은 이제 단순한 ‘수리공’이 아니라, 고객의 진짜 문제를 찾아내고, 그들의 환경에 맞는 최적의 해결책까지 ‘설계’해주는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무서웠다. 그들은 이제 고객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대한민국 곳곳의 낡은 공장과 상가에서, 절박한 사연을 가진 의뢰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네 명의 친구들은 매일 밤 사무실에 모여, 그날 해결했던 문제들과, 새롭게 들어온 의뢰들을 공유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 대신, 30년 만에 되찾은 일하는 기쁨과,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뜨거운 보람이 가득했다. 그들은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고민하며, 서로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인생 2막 기술지원’. 작고 초라하게 시작했던 그들의 회사는, 이제 세상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조용하지만 강렬한 빛을 내뿜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12화] 김태준의 역습

‘인생 2막 기술지원’의 명성이 업계에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을 무렵, 한기성의 옛 직장이었던 DK정밀의 사무실은 싸늘한 냉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던 김태준 팀장이 있었다.

처음에 그는 한기성의 퇴사를 반겼다. 눈엣가시 같던 늙은 기술자가 사라진 것이 후련했다. 그가 차렸다는 허름한 회사의 소문을 들었을 때도, 그는 코웃음을 쳤다. ‘퇴직금이나 까먹다가 얼마 못 가 망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한기성의 회사는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포기했던 ‘돈 안 되는 시장’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더 기분 나빴던 것은, 업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듣게 되는 말들이었다.

“김 팀장, 자네 회사에 있던 한기성 부장 말이야. 완전 용됐더만! 독일 본사도 못 고치는 걸 해결했다며?” “DK정밀은 그런 인재를 왜 퇴직시켰나 몰라. 요즘 중소기업들 사이에선 그 양반 모셔가려고 줄을 섰다던데.”

칭찬은 한기성을 향했지만, 그 화살은 모두 김태준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쫓은, 속 좁고 무능한 상사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가 났다.

‘감히… 나를 물로 봐?’

그는 더 이상 이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다. 한기성을, 그리고 그의 보잘것없는 회사를 자신의 발아래 완벽하게 짓밟아버려야 했다.

김태준은 비열했지만, 영리했다. 그는 한기성의 ‘기술력’을 공격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았다. 대신, 그는 그들의 가장 약한 고리, 바로 ‘법’과 ‘절차’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회사의 법무팀과 정보보안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기성 부장이 퇴사하기 전, 회사 내부망에 접속했던 모든 기록을 샅샅이 뒤지세요. 특히, 개인 장비로 어떤 데이터에 접근했는지, 단 하나의 로그도 놓치지 말고 찾아내란 말입니다.”

며칠 후, 그의 책상 위에는 수백 장에 달하는 분석 보고서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이 원하던 ‘먹잇감’을 발견했다.


화창한 오후, ‘인생 2막 기술지원’ 사무실은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밀려들었던 의뢰를 겨우 마무리하고, 다음 주에 있을 대형 계약을 준비하며 네 명의 친구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박재혁이 제안한 파주 출판단지의 인쇄기 통합 유지보수 계약. 그들이 처음으로 맡게 되는 ‘억’ 단위의 대형 프로젝트였다. 이 계약만 성공적으로 따내면, 회사는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번 계약만 잘 성사되면, 우리도 이제 정식으로 직원들 좀 뽑아야겠어. 이동진 너도 언제까지 혼자 전화 다 받을 순 없잖아.” 박재혁이 기분 좋게 말하며, 모두에게 커피를 돌렸다.

바로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우체부 아저씨가 들어왔다. “‘인생 2막 기술지원’ 앞으로 온 등기우편입니다.”

박재혁이 무심코 우편물을 받아들었다. 발신인은 ‘DK정밀 법무팀’이었다. 그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봉투를 뜯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봉투 안에는, 차가운 법률 용어로 가득한 ‘내용증명’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수신: 인생 2막 기술지원 대표 한기성] [발신: DK정밀 주식회사 법무팀] [제목: 영업비밀 침해 및 부정경쟁행위 중지에 관한 통고서]

[귀하(한기성)는 DK정밀 재직 당시, 당사의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산업 설비 예측 정비 데이터 및 분석 알고리즘’에 부당하게 접근하였으며, 퇴사 후 이를 무단으로 사용하여 유사 기술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당사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습니다. (부정경쟁방지법 제2조 제1호)]

[이에 당사는 귀하에게 현재 진행 중인 모든 관련 영업 행위를 즉시 중단할 것을 통고하며, 본 통고서를 수령한 날로부터 7일 이내에 서면으로 회신하지 않을 경우, 당사는 영업비밀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및 형사 고소 등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하는 바입니다.]

내용증명을 다 읽은 박재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최민수와 이동진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굳어버렸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최민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박재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태준 그 자식 짓이야. 우리가 퇴사 전에 습득한 기술로 사업을 하고 있으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는 협박장이야. ‘예측 정비 알고리즘’이라니… 말도 안 돼. 그런 게 우리 회사에 있었으면 진작에 유령을 잡았겠지. 전부 없는 사실을 엮어서 우리 발목을 잡으려는 수작이야.”

한기성은 말없이 내용증명을 받아 들었다. 그의 손이 분노로 떨려왔다. MyAISmarteasy. 자신의 경험과 AI의 도움으로 이뤄낸 성과를, 그들은 ‘훔친 기술’이라는 누명을 씌워 송두리째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이동진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우리가 얼마나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건 강도나 다름없잖아!”

설상가상으로, 박재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파주 출판단지 계약 담당자였다. 전화를 끊은 박재혁의 얼굴은 절망 그 자체였다. “……계약, 보류됐어. DK정밀 쪽에서, 우리 회사가 ‘보안이 검증되지 않은 업체’이며, ‘기술 유출 혐의로 곧 법적 분쟁에 휘말릴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나 봐. 계약 담당자가, 일단 모든 게 깨끗해지기 전까지는 계약을 진행할 수 없다고 하네.”

사무실 안은 차가운 침묵에 휩싸였다. 창립 이래 최대의 위기. 김태준의 역습은 상상 이상으로 치명적이고 집요했다. 그는 ‘인생 2막 기술지원’의 숨통을, 법과 소문이라는 두 개의 칼날로 동시에 조여오고 있었다.

그날 밤, 네 명의 친구는 말없이 소주잔만 기울였다. 최민수는 분을 삭이지 못했고, 이동진은 망연자실했다.

박재혁이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방법은 두 가지야. 첫째, 저놈들이 원하는 대로 사업을 접는 것. 둘째, 변호사를 선임해서 법정 싸움을 시작하는 것.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야. DK정밀은 국내 최고의 로펌을 쓸 거고, 우리는 소송비용조차 감당하기 힘들어. 재판이 몇 년을 끌게 될지도 모르고, 그 사이에 우리 회사는 완전히 말라죽게 될 거야.”

그의 말에는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그들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그때, 줄곧 말이 없던 한기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 방법이 하나 더 있어.”

친구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우리는… 법정에서 싸우는 게 아니야. 현장에서 증명하는 거야.” 그의 눈은 분노나 절망이 아닌, 차갑고 단단한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의 기술이 ‘훔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세상 그 누구도 훔칠 수 없는, 오직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면 돼. 그들의 시스템과 데이터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우리의 경험과 이 녀석(MyAISmarteasy)으로 해결해 내는 거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란 듯이.”

그는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이건 위기지만, 동시에 기회야.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세상에 증명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라고.”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결연한 의지에, 절망에 빠져 있던 친구들의 눈에 다시 희미한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박재혁이 물었다. “……어떻게?”

한기성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는 지난 몇 주간, MyAISmarteasy와 함께 분석해 온 ‘보물 지도’를 화면에 띄웠다. 대한민국 전국의, 15년 이상 된 노후 설비를 보유하고 있지만, 대기업의 지원 대상에서는 제외된 수백 개의 소규모 공장 리스트.

“여기, 이 중에서 가장 절박하고, 가장 어려운 문제를 가진 곳을 우리가 찾아가는 거야.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완벽하게 해결해 내는 거지.”

그의 손가락이 지도 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은, 수십 년간 대한민국 신발 산업을 이끌었지만, 이제는 값싼 중국산에 밀려 쇠락해버린 부산의 한 작은 신발 부품 공장이었다. 그리고 그 공장이 겪고 있는 문제 설명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문제: 25년 된 고무 배합기, 원인 불명의 경화 불량. 지난 6개월간 불량률 70% 이상. 공장 폐업 직전.]

한기성은 친구들을 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의 다음 현장은, 부산이다.”


 

[제13화] 예상치 못한 지원군

부산행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낡은 승합차 안, 네 명의 친구들은 저마다 다른 무게의 침묵을 짊어지고 있었다. ‘인생 2막 기술지원’의 명운이 걸린 출장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희망보다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DK정밀이 보낸 내용증명은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박재혁은 밤새 자문 변호사와 통화하느라 눈이 퀭했다. 변호사의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상대가 작정하고 물고 늘어지면,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회사는 고사할 겁니다. 현실적으로… 합의를 보시는 게….”

최민수는 애써 활기찬 척 떠들었지만, 그의 농담에는 평소의 생기가 없었다. 그는 아내에게 “큰 계약 건으로 며칠 부산에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온 터였다.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동진은 그저 창밖만 묵묵히 바라보았다. 어렵게 되찾은 삶의 보람이, 다시 신기루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오직 한기성만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낡은 스마트폰이 놓여 있었다. 그는 밤새 MyAISmarteasy와 함께, 부산 신발 공장의 25년 된 ‘고무 배합기’에 대한 모든 것을 분석했다. 단종된 부품의 설계도, 비슷한 모델에서 발생했던 고장 사례, 심지어 그 기계가 만들어졌던 1990년대의 고무 공학 기술 논문까지.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수십 번이나 그 낡은 기계를 분해하고 조립했다.

그에게 이것은 도박이 아니었다. 이길 수밖에 없는, 철저하게 준비된 싸움이었다.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부산의 신발 공단. 한때는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처럼 뛰었을 그곳은, 이제는 곳곳이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문 닫은 공장의 텅 빈 창문들이 그들을 을씨년스럽게 맞았다.

그들이 찾아간 ‘태화고무’는 그 쇠락의 풍경 속에서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작은 공장이었다. 70대의 노사장과, 그의 곁을 지키는 두세 명의 동년배 직원들이 전부였다.

노사장은 네 사람을 보자마자 하소연부터 늘어놓았다. “아이고, 사장님들… 잘 오셨소. 저놈의 배합기 때문에 내 속이 다 썩어 문드러졌소. 6개월 전부터 갑자기 고무가 제대로 굳지를 않아. 똑같은 원료에, 똑같은 시간, 똑같은 온도로 배합을 하는데, 어떤 날은 돌덩이처럼 나오고, 어떤 날은 젤리처럼 물렁하게 나와. 불량률이 70%가 넘으니, 이제는 주문도 다 끊기고… 다음 달엔 정말 공장 문 닫아야 할 판이오.”

한기성은 친구들과 함께 문제의 배합기 앞에 섰다. 25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거대한 쇠솥 같은 기계였다. 표면은 녹이 슬고 기름때가 엉겨 붙어, 원래 색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다.

한기성은 늘 하던 대로, 기계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이번 문제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단순한 기계적 결함이 아니었다. 이것은 화학과 물리학이 복잡하게 얽힌 ‘재료 공학’의 영역이었다.

그는 MyAISmarteasy를 켰다. ‘고무 배합 공정 분석 시작. 현재 온도 165도, 배합 시간 12분. 주 원료는 천연고무, 충전재는 카본블랙. 경화 불량의 원인을 찾아내.’

AI가 즉시 분석을 시작했다. [경화 불량의 일반적인 원인은 배합 온도, 시간, 압력의 불일치 또는 원료 자체의 변질입니다. 먼저, 배합기 내부의 온도 센서와 압력 게이지의 정상 작동 여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한기성은 AI의 지시에 따라 센서들을 점검했다. 하지만 모든 센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원료.

[원료 보관 창고의 온도와 습도 데이터를 확인해 주십시오. 천연고무는 고온 다습한 환경에 노출될 경우 분자 구조가 변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고의 환경 역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미궁에 빠져들었다. 친구들의 얼굴에 다시 불안한 기색이 스며들었다. 이 문제마저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들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한기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AI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가설을 확장해. 기계와 재료, 환경 이외에, 경화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외부 요인을 분석해. 전력, 수질, 심지어 공기 중의 성분까지도.’

AI는 침묵했다. 너무나 광범위하고, 데이터가 부족한 명령이었다. 바로 그때, 한기성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 메시지였다.

[선배님. 저 오하윤입니다. 지금 혹시 부산에 계신가요?]

한기성의 눈이 커졌다. 오하윤. 그가 회사를 나온 뒤로는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던 그녀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가 답장을 보내자마 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선배님! 지금 어디세요? 제가 지금 부산역인데….” 오하윤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한 시간 후, 태화고무 공장의 낡은 사무실. 커피 자판기 앞에서, 한기성과 오하윤이 마주 앉았다. 그녀는 주말을 이용해, 회사에는 비밀로 하고 KTX를 타고 곧장 부산까지 내려온 터였다.

“하윤 씨, 대체 어떻게….” “선배님 회사 앞으로 온 내용증명, 우연히 봤어요. 그리고… 김태준 팀장님이 법무팀이랑 이야기하는 것도 들었고요.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이건 공정한 경쟁이 아니잖아요.”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한기성에 대한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김 팀장님, 지금 혈안이 되어 있어요. 선배님이 실패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요. 부산에 어려운 의뢰를 맡아서 가셨다는 소문, 벌써 사내에 다 퍼졌어요. 만약 이번 일마저 해결하시면, 그 사람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녀는 자신이 몰래 백업해 온 USB 하나를 한기성에게 건넸다.

“이거… 선배님 퇴사하시기 전에, ‘3라인 유령’ 해결했을 때 저희가 함께 분석했던 모든 원본 데이터랑 보고서, 그리고 관련 이메일들이에요. 그리고 이건… 김 팀장님이 그 성과를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려 했는지에 대한 증거들이고요. 선배님의 기술이 ‘훔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선배님 것이었다는 걸 증명해 줄 자료들이에요. 법정 싸움까지 가게 되면, 꼭 필요할 거예요.”

한기성은 USB를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안위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대를 뛰어넘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 준 이 젊은 후배의 모습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차올랐다.

“고마워요, 하윤 씨. 정말….” “아니에요, 선배님. 제가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일 뿐이에요. 그런데… 이 공장 문제는 좀 어떠세요? 해결의 실마리는 찾으셨고요?”

한기성은 고개를 저으며, 지금껏 분석한 내용들을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오하윤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역시, 평범한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선배님. 혹시… ‘물’은 확인해 보셨어요?” “물?” “네. 고무 배합할 때, 기계 냉각수로 공업용수를 쓰실 거 아니에요. 만약 그 물의 성분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면, 그게 배합 과정에서 증발하며 화학 반응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어요.”

한기성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물.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그는 즉시 MyAISmarteasy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부산시 상수도 사업 본부의 공개 데이터를 확인해. 특히 이 공장이 위치한 사상구 지역의 지난 1년간 수질 데이터 변화를 분석해 줘. 경도, pH 농도, 미네랄 성분까지 전부.’

AI가 데이터를 분석하는 동안, 오하윤은 자신의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빠르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개의 화면에 거의 동시에 놀라운 결과가 떠올랐다.

[AI 분석 결과: 약 6개월 전부터, 해당 지역 공업용수의 ‘칼슘 이온(Ca2+)’ 농도가 미세하게 상승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는 낙동강 상류의 수질 변화와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찾았어요, 선배님!” 오하윤이 자신이 찾은 화학 논문을 화면에 띄웠다. “이 논문에 따르면, 고무 경화 과정에서 물에 포함된 미량의 칼슘 이온이 촉매제 역할을 하는 ‘황(Sulfur)’ 성분과 먼저 결합하여, 황의 활성도를 떨어뜨린다고 나와 있어요. 즉, 물속의 칼슘이 경화제를 방해해서 고무가 제대로 굳지 않게 만든 거예요!”

모든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6개월 전, 수질이 변했다. 그리고 6개월 전, 경화 불량이 시작되었다. 원인은 기계도, 재료도, 환경도 아닌, 바로 그들이 매일같이 쓰던 ‘물’이었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배합 과정에 들어가는 공업용수 라인에 ‘연수기(이온 교환 수지 필터)’를 설치하여, 물속의 칼슘 이온을 제거해 주는 것이었다.


다음 날, 한기성과 오하윤, 그리고 친구들은 함께 연수기를 설치했다. 노사장은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그들의 확신에 찬 모습에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모든 설치가 끝나고, 첫 번째 배합이 시작되었다. 12분이 흐른 뒤, 육중한 배합기의 문이 열리고, 뜨거운 김과 함께 검은 고무 반죽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사장은 떨리는 손으로 고무 샘플을 떼어내 식혔다. 그리고는 자신의 평생 경험이 담긴 손끝의 감각으로, 고무의 탄성과 경도를 확인했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서서히 환한 미소로 바뀌어 갔다.

“……맞다! 이 느낌이 맞다! 단단하면서도 쫄깃한, 바로 이 느낌이야! 돌아왔어! 우리 고무가 돌아왔어!”

노사장은 아이처럼 기뻐하며 한기성의 손을 붙잡았다. 공장의 늙은 직원들도 서로를 부둥켜안고 환호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폐업 직전에서 되살아난 기적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들의 얼굴에도 진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박재혁은 법률 서류 대신, 이 감동적인 순간을 자신의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았다. 최민수는 노사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 기뻐했고, 이동진은 말없이 눈가를 훔쳤다.

그때, 오하윤이 한기성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선배님. 이제 김태준 팀장님께 보여줄, 가장 확실한 ‘증거’가 생긴 셈이네요. 그 어떤 법률이나 데이터보다도, 바로 저분들의 저 웃음이요.”

한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것은 김태준을 향한 가장 통쾌한 반격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싸우는 대신, 현장에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냈다.

부산에서 돌아오는 승합차 안. 네 명의 친구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산의 명물인 돼지국밥과 씨앗호떡 이야기를 하며, 소년처럼 웃고 떠들었다.

한기성의 주머니 속에서는, 오하윤이 건네준 USB가 든든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법적 분쟁을 위한 증거 자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낡은 세대의 경험을 존중하고, 새로운 세대의 정의를 믿어준, 예상치 못했던 지원군이 보내온 희망의 신호였다.

그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제14화] 최고의 증명

부산에서의 성공은 달콤했지만, 현실은 쓰디썼다. 서울로 돌아온 ‘인생 2막 기술지원’ 팀을 맞이한 것은, DK정밀 법무팀이 보낸 두 번째 내용증명이었다. 내용은 더 악랄해져 있었다. ‘부산 태화고무의 문제 해결 역시, 당사의 내부 데이터를 무단으로 활용한 정황이 포착되었음. 즉각 모든 영업 행위를 중단하지 않을 시, 가처분 신청을 포함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것임.’

김태준은 그들이 재기할 모든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릴 작정이었다. 박재혁이 오하윤이 건넨 USB를 바탕으로 반박 자료를 준비했지만, 거대 기업과의 법적 분쟁은 시작부터 그들의 기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사무실에는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들의 기술력은 진짜였지만, 세상은 그 기술을 펼칠 무대를 허락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바로 그날 오후였다. 사무실의 낡은 TV 화면에서, 긴급 속보를 알리는 자막이 떠올랐다.

[속보: 수도권 최대 규모 KDX 산업단지, 전체 스마트 팩토리 시스템 마비…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 추정]

네 명의 친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KDX 산업단지. 그들이 평생을 바쳤던 DK정밀이 위치한,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부였다.

앵커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현재 KDX 산업단지 내 수십 개 기업의 스마트 팩토리 시스템 전체가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 공격으로 인해 완전히 멈춰 섰습니다. 생산 라인이 마비되면서, 피해액은 시간당 수천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정부와 IT 보안 업계는 긴급 대응팀을 파견했지만, 바이러스의 변종이 너무 빨라 복구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화면에는 혼란에 빠진 공장의 모습이 비쳤다. 붉은 경광등이 번쩍이는 가운데, 속수무책으로 멈춰 선 로봇 팔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 풍경은 한기성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바로 어제의 자신의 일터였다.

최민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꼬시다, 꼬셔. 남의 발목 잡으려다 제 발등 찍은 게지. 아주 잘됐다!” 이동진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래도… 저기서 일하는 우리 옛날 동료들은 무슨 죄냐. 다들 속이 타들어 가겠구먼.”

박재혁은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사태야. 단순한 랜섬웨어를 넘어선, 산업 시스템 전체를 노린 사이버 테러일 가능성이 높아.”

한기성은 아무 말 없이, 화면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누군가에게 고함을 치고 있는 김태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시스템을 맹신했지만, 그 시스템이 무너진 지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도 그의 무력함과 공포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는 생각했다. ‘나라면… 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쥐고, MyAISmarteasy에게 질문을 던질 뻔했다. 이것은 엔지니어로서의 본능이었다.


한편, DK정밀의 중앙 통제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복구 안 돼? 백업 서버로 복원하라니까!” 김태준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오하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안 됩니다, 팀장님! 백업 서버에 접속하는 순간, 바이러스가 다시 감염됩니다! 네트워크에 아직 살아있어요! 이건 우리가 알던 바이러스가 아니에요. 스스로를 복제하고, 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 변이하고 있어요!”

국내 최고의 IT 보안 전문가들이 달라붙었지만, 바이러스는 그들의 모든 노력을 비웃듯 시스템을 좀먹어 들어갔다. 공장장은 사색이 된 채, 본사 회장으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며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의 수십 년 경력이, 오늘 이 자리에서 끝장날 위기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김태준은 이제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못했다. 그는 그저 에러 메시지만 가득한 거대한 모니터 앞에서, 땀만 뻘뻘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데이터와 시스템은, 전례 없는 공격 앞에서 종이 호랑이에 불과했다.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던 그때, 공장장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자신이 ‘낡았다’고 무시하고, 김태준이 ‘규정 위반’이라며 내쫓았던 남자. 한기성.

그는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모두 내던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개인 휴대폰으로, 떨리는 손가락을 눌러 한기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한기성의 휴대폰에 낯선 번호가 떴지만, 그는 왠지 그 전화가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잔뜩 잠기고 갈라진 공장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부장… 아니, 한 사장. 나요, 공장장이오.” “…….” “미안하오. 내가… 내가 염치없는 놈이라는 거 아오. 하지만… 지금 우리 공장이, 아니, 이 산업단지 전체가 죽게 생겼소. 제발… 제발 와서 한번만 봐주시오. 당신의 ‘경험’이 필요하오. 제발….”

그의 목소리에는 애원과 절박함이 가득했다. 전화를 끊은 한기성을, 친구들이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최민수가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섰다. “미쳤어? 우리가 거길 왜 가! 우리를 그렇게 내쫓고, 고소하겠다고 협박까지 한 놈들이야! 가서 뭘 어쩌자고!”

박재혁이 그의 말을 받았다. “민수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자. 이건 기회야. 김태준과 DK정밀 법무팀이 보란 듯이, 수많은 언론과 업계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우리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여기서 우리가 성공하면, 그깟 내용증명은 휴지조각이 되는 거야.”

이동진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가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우리와 함께 땀 흘렸던 동료들을 위해서. 그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잖아.”

모두의 시선이 한기성에게로 향했다. 한기성은 잠시 눈을 감았다. 복수심, 사업적 계산, 동료에 대한 연민. 그 모든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잠재운 것은, 엔지니어로서의 아주 단순하고 순수한 본능이었다.

그는 눈을 떴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징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자.”

그는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의사는 환자를 가리지 않아. 기계가 고장 났고, 우리는 그것을 고치는 사람이야. 그게 우리 ‘인생 2막 기술지원’이 존재하는 이유다.”


한 시간 후, ‘인생 2막 기술지원’의 낡은 승합차가 KDX 산업단지의 정문을 통과했다. 정문의 경비원은 한기성을 알아보고, 경례와 함께 굳게 닫혔던 차단기를 열어주었다.

DK정밀 공장 안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사방에서 고성과 탄식이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넋이 나간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한기성과 친구들이 중앙 통제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들 속에는 불신과 호기심,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김태준은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한기성을 쳐다봤다. 공장장이 다가와 한기성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와줘서 고맙소, 한 사장. 제발… 우리 좀 살려주시오.”

한기성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는 통제실 중앙의 거대한 메인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화면 가득히 떠 있는 붉은 에러 메시지들은, 마치 시스템 전체가 흘리는 피눈물처럼 보였다.

그는 돌아서서, 자신의 팀에게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 “김태준 팀장님, 그리고 여기 계신 보안 전문가분들. 지금까지 바이러스의 ‘패턴’을 분석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는 통제실 안의 모든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바이러스는, 대체 ‘어떻게’ 우리 공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그는 바이러스 자체를 분석하는 대신, 그것이 침투한 ‘경로’를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기계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던 그의 방식이었다.

그는 MyAISmarteasy를 자신의 노트북에 연결했다. 그리고는 DK정밀의 방화벽 로그, 네트워크 접속 기록, 지난 한 달간의 모든 데이터 트래픽을 AI에게 입력했다.

“박 사장, 자네는 공장장님과 함께 최근 한 달간 있었던 모든 시스템 변경 이력과 외부 업체 방문 기록을 확인해 줘. 아주 사소한 거라도 놓치지 말고.” “최 사장, 자네는 현장으로 가서, 우리 옛 동료들을 만나. 최근에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이 부장, 자네는 나랑 같이 있자. 우리가 놓치는 게 없는지, 꼼꼼하게 더블 체크해 줘.”

그의 지시는 차분하고 명확했다. 통제 불능의 혼란에 빠져 있던 통제실은, 그의 지휘 아래 조금씩 질서를 되찾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흘렀다. AI는 수백 테라바이트에 달하는 데이터를 분석했지만, 뚜렷한 침입 경로를 찾지 못했다. 방화벽은 완벽했고, 외부망을 통한 해킹의 흔적은 없었다.

바로 그때, 현장에서 돌아온 최민수가 다급하게 보고했다. “기성아,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 일주일 전에, 3라인 구석에 있는 냉각수 펌프 제어반이 자꾸 오작동을 해서, 그걸 납품했던 중소기업 직원이 와서 하루 종일 그걸 고치고 갔다는군. 아주 젊은 친구였다고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한기성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그는 AI에게 명령했다. ‘일주일 전, 3라인 냉각수 펌프 제어반의 모든 로그 기록을 집중 분석해. 그리고 그 제어반이 연결된 네트워크 허브의 위치를 찾아내.’

AI의 화면에, 공장 전체의 네트워크 토폴로지 맵이 떠올랐다. 그리고 문제의 제어반이 연결된 곳은, 중앙 통제실의 메인 서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 창고처럼 변해버린, 구관 3층의 낡은 ‘유지보수용 서브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었다.

[경고: 해당 서브 네트워크는 보안 업데이트가 5년 전에 중단된, 심각한 보안 취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AI의 경고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한기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부장, 가자!”

그들은 통제실을 나와, 먼지가 뽀얗게 쌓인 구관 3층의 낡은 통신 장비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잊혔던 기계들의 냄새가 풍겨왔다.

수십 개의 랙(Rack) 서버와, 거미줄처럼 얽힌 케이블들. 한기성은 손전등으로 그 사이를 비추며, AI가 알려준 17번 랙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랙 가장 아래쪽,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낡은 네트워크 스위치 허브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허브의 깜빡이는 램프들 사이에, 아주 작은, 엄지손톱만 한 USB 동글 하나가 교묘하게 숨겨져 꽂혀 있었다.

“……찾았다.”

그것이 바로, 이 모든 재앙의 시작점이었다. 외부 업체 직원으로 위장한 누군가가, 보안이 가장 취약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 낡은 장비에 물리적으로 ‘백도어’를 심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백도어를 통해, 산업단지 전체를 마비시킨 괴물 바이러스를 시스템 깊숙이 침투시킨 것이다.

이것은 최첨단 해킹이 아니었다. 인간의 부주의와, 낡은 것에 대한 무관심을 파고든, 가장 고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공격이었다.


모든 원인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한기성은 동글을 뽑아 들고 중앙 통제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것을, 망연자실한 표정의 공장장과 김태준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바이러스의 침입 경로는 차단했습니다. 이제 백업 서버로 복원 작업을 시작해도 좋습니다.”

통제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길고 어두웠던 터널의 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한기성은 공장장과 김태준 앞에 섰다. 그는 더 이상 그들의 부하 직원이 아니었다. 그는 이 재앙을 해결한 구원자이자, 그들의 오만을 심판하는 심판자였다.

그는 조용히, 하지만 그 어떤 고함보다도 무겁게 말했다. “공장장님. 이 사태의 진짜 원인은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그는 낡은 USB 동글을 가리켰다. “바로 이겁니다. 당신들이 ‘효율’과 ‘성과’에 눈이 멀어, 가장 기본적이고 낡은 것들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당신들은 화면에 뜨는 화려한 데이터는 믿었지만, 창고 구석에서 먼지 쌓여가는 낡은 장비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시스템을 믿었지만,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과, 그 시스템이 놓여 있는 현장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이, 고개를 푹 숙인 김태준에게로 향했다. “김 팀장. 진정한 엔지니어는, 가장 빛나는 첨단 기술이 아니라, 가장 어둡고 낡은 곳에서 문제를 찾아내는 사람이야. 그걸 잊는 순간, 자네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그냥 기계 관리자에 불과해.”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쳤던 공장장에게 말했다. “기계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은,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묵묵히 통제실을 걸어 나왔다. 그들의 등 뒤로, DK정밀의 직원들이 보내는 경외와 감사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인생 2막 기술지원’의, 가장 완벽하고도 통쾌한 증명이었다. 법정에서의 백 마디 변론보다도 강력한, 현장에서의 승리였다.


 

[제15화] 그리하여, 현역(現役)

KDX 산업단지의 재앙을 막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 날, ‘인생 2막 기술지원’의 작은 사무실에는 어색한 고요함이 흘렀다. 전날의 극적인 승리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네 명의 친구들은 아직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한 사람들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거나, 의미 없이 컵을 만지작거렸다.

어제의 환호와 박수는 사라지고, 그들의 앞에는 여전히 DK정밀이 보낸 내용증명이라는 차가운 현실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현장에서의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법과 자본이라는 보이지 않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이동진이었다. 그는 묵묵히 탕비실로 가, 서툰 손길로 인스턴트커피 네 잔을 탔다. 그리고는 친구들의 책상 위에 하나씩,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다들… 고생했다.”

그의 투박한 한마디에, 얼어붙었던 사무실의 공기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최민수는 종이컵을 받아 들고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고생은 했는데… 이제 앞으로가 문제지. 김태준 그 자식이 이대로 물러설 놈이 아니야. 분명히 또 다른 걸로 우리 발목을 잡으려고 할 거라고.”

박재혁은 밤새 자문 변호사와 통화하느라 퀭한 눈으로 노트북 화면을 켰다. “일단 우리가 KDX 산업단지를 구한 건 사실이야. 여론은 우리 편이겠지. 하지만 법정은 여론만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야. 저쪽에서 작정하고 물고 늘어지면, 결국 우리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무실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네 사람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했다. 또 다른 악재를 예고하는 전주곡처럼 느껴졌다. 이동진이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인생 2막 기술지원입니다.” 잠시 수화기를 들고 있던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네? 어디… 어디시라고요? 아, 네! 네, 잠시만요!”

그는 황급히 수화기를 막고,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얘들아! 이거… ‘월간 엔지니어’라는 잡지사인데? 우리… 우리 인터뷰하고 싶다고 연락 왔어!”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전화를 시작으로, 사무실의 전화기는 쉴 틈 없이 울려댔다. “안녕하십니까, YTN 사이언스입니다. 한기성 대표님과 인터뷰 약속을 잡고 싶습니다.” “여기는 파주 출판단지 협동조합입니다. 저희 인쇄기 유지보수 계약 건, 다시 긍정적으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저는 중소기업 중앙회 소속입니다만, 저희 회원사들을 대상으로 ‘노후 설비 스마트 유지보수’에 대한 강연을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전화기 너머에서는,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세상의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KDX 산업단지 사태의 전말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감’과 ‘데이터’의 위대한 만남, 산업단지를 구한 숨은 영웅들] [시스템을 넘어선 베테랑의 통찰, DK정밀 사태의 재조명] [‘인생 2막 기술지원’, 대기업이 포기한 시장에서 새로운 희망을 쏘다]

인터넷 뉴스 포털과 업계 전문지들은 앞다투어 그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쏟아냈다. 그들은 더 이상 ‘기술 유출 혐의를 받는 작은 업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을 구한 ‘이름 없는 영웅’이자, 새로운 시대의 대안을 제시하는 ‘혁신가’로 조명받고 있었다.

최민수와 이동진은 밀려드는 전화를 받으며 어쩔 줄 몰라 했고, 박재혁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태연한 척 인터뷰 일정을 조율했다. 세상의 반응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았다.


한편, 그들이 떠나온 DK정밀에서는 그들로 인한 또 다른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긴급 이사회. 그룹 회장까지 참석한 그 자리에서, 김태준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앞에는, 그가 한기성에게 보냈던 내용증명과, 오하윤이 한기성에게 건넸던 증거 자료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공장장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책임을 통감하는 자의 깊은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 “이번 사태의 일차적인 책임은, 현장 책임자인 저에게 있습니다. 저는 시스템을 과신했고,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특히, 한기성 부장의 능력을 제때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잃은 것은 제 평생의 과오로 남을 것입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김태준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최악으로 만든 것은 명백한 인재(人災)입니다. 김태준 팀장은 자신의 무능을 덮기 위해, 회사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한기성 부장을 ‘기술 유출범’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이는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은 물론, 엔지니어로서의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린 행위입니다. 저는 이사회의 정식 징계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김태준은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했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몰락은 빠르고 철저했다. 그는 모든 보직에서 해임되었고,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친 책임을 물어 정직 처분을 받았다.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렸던 엘리트로서의 커리어는, 그의 오만함과 함께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다음 날 오후, ‘인생 2막 기술지원’의 허름한 사무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DK정밀의 공장장이었다. 그의 손에는 값비싼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수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사무실의 네 친구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의 동지이자, 오늘의 적이었으며, 이제는 초라한 패배자가 되어 찾아온 옛 상사. 그를 어떤 표정으로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공장장은 한기성의 앞에 다가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 사장… 아니, 한 부장.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하네.”

그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어. 자네 같은 보물을 내 손으로 내친 꼴이야. 김태준 그놈이 자네를 그렇게 몰아세울 때,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면목이 없네.”

한기성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사과를 받았다. 공장장은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본론을 꺼냈다.

“한 부장, 다시… 다시 우리 회사로 돌아와 주면 안 되겠나?” 그것은, 한기성이 지난 30년간 어쩌면 가장 듣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자네를 위해 새로운 부서를 만들겠네. ‘기술 혁신 센터’. 센터장 자리를 맡아주게. 지금 받는 연봉의 세 배, 아니, 다섯 배를 주겠네. 최고의 연구원들과 최첨단 장비도 지원하겠네. 자네의 그 경험과 통찰력, 더 이상 낡은 공장 구석에서 썩히지 말고, 우리 회사와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를 위해 써주게. 제발… 부탁일세.”

그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그것은 한기성의 능력에 대한 최고의 인정이자, 그가 잃어버렸던 모든 명예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였다. 친구들의 시선이 한기성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한기성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는, 그가 구했던 KDX 산업단지의 굴뚝들이 여전히 힘차게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공장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장장님. 그 제안,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공장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왜… 왜인가? 조건이 부족한가? 뭐든 말만 하게. 내가 다 맞춰주겠네.”

“조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기성은 자신의 친구들을 한번 둘러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지난 30년간, 공장장님의 말씀처럼 대한민국 제조업을 위해 일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제가 고치는 기계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기계가 멈추면 누가 눈물을 흘리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부품처럼, 시키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낡은 스마트폰을 가만히 들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저는 이제, 친구의 치킨 가게 튀김기가 멈추면 친구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압니다. 동네 세탁소 할머니의 낡은 세탁기가, 그분의 평생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더 이상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뜨거운 사람의 마음을 고치고 싶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어떤 외침보다도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 “제가 있을 곳은, 최첨단 장비가 있는 기술 혁신 센터가 아니라, 바로 여기. 제 친구들이 있는 이 허름한 사무실입니다. 저에게 ‘현역’이란, 높은 자리에 앉아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 곁에서 함께 땀 흘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명예를 되찾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명예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공장장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는 한기성의 눈에서, 돈이나 명예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스스로의 가치를 깨달은 자의 깊고 평온한 빛을 보았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자네 말이 맞네. 내가… 또 틀렸어. 부디… 건강하게. 그리고 성공하게. 멀리서나마 늘 응원하겠네.”

그가 쓸쓸히 사무실을 떠나고 난 뒤, 네 명의 친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어떤 승리보다도 더 값진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박재혁의 노트북에서 ‘메일 도착’을 알리는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발신인은, DK정밀 법무팀이었다.

박재혁이 긴장된 표정으로 메일을 열었다. 첨부된 PDF 파일의 제목은 이러했다.

[통고서 철회 및 공식 사과문]

김태준의 역습은, 이렇게 완전히 끝이 났다. 그리고 잠시 후, 박재혁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파주 출판단지 계약 담당자였다.

“한 대표님! 저희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이 났습니다! 기존 계약보다 두 배 큰 규모로, 5년간의 장기 파트너십을 맺고 싶습니다! 저희의 미래를, ‘인생 2막 기술지원’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한기성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기분 좋은 소식을 들으며,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의 30년 기술자 인생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진짜 전성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진정한 ‘현역’이 되었다.


 

[제16화 / 최종화] 새로운 시대의 청사진

1년 후, 봄. 경기도의 한적한 외곽 지역, 낡은 창고와 공장들 사이에 유독 깔끔하고 활기 넘치는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간판에는 세련되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서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단법인 시니어 기술 협동조합 – 인생 2막 본부]

과거 ‘인생 2막 기술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네 친구의 허름한 사무실은, 이제 대한민국 산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적 기업이자, 수많은 퇴직 기술자들의 새로운 희망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작은 날갯짓은, 이제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태풍의 눈이 되어 있었다.

DK정밀과의 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후, 그들에게는 기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파주 출판단지와의 성공적인 장기 계약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국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그들의 ‘솔루션’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하지만 한기성과 친구들은 회사를 무한정 키워 몸집을 불리는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 노하우와 기술을 독점하는 대신, 그것을 세상과 나누기로 결심했다. 박재혁의 치밀한 기획과 정부의 중소기업 상생 펀드 지원을 받아, 그들은 비영리 사단법인을 설립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전국의 퇴직 기술자들을 모아 새로운 시대의 ‘해결사’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성공은 더 이상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성공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조합의 넓은 강의실은, 하얀 머리카락과 깊은 주름, 그리고 스무 살 청년의 것보다 더 뜨거운 배움의 열정으로 가득 찬 50대, 60대, 심지어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친 70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평생을 만져온 렌치와 드라이버 대신, 어색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거친 손가락이 화면 위를 조심스럽게 누를 때마다, 새로운 시대의 문이 하나씩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이 모든 기적을 만들어낸 남자, 한기성이 서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기름때 묻은 작업복이 아닌, 깔끔한 셔츠 차림이었지만, 그의 손등에 깊게 팬 힘줄과 눈빛에 서린 장인의 깊이는 여전했다.

“자, 다들 주목해 주십시오. 오늘 강의의 주제는 ‘MyAISmarteasy, 내 파트너와 소통하는 법’입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기술적인 원리를 배웠다면, 오늘부터는 이 똑똑한 녀석과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울 겁니다.”

한기성은 이제 베테랑 강사처럼, 여유로운 유머를 섞어가며 강의를 이끌어 나갔다. “많은 분들이 AI라고 하면, 어렵고 복잡한 컴퓨터 기술부터 떠올리십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외계어처럼 들렸죠. 하지만 제가 지난 1년간 이 똑똑한 파트너와 함께 일하며 깨달은 것은 딱 하나입니다. 이 녀석은… 사실 기계라기보다는, 아주 예의 바르고 아는 건 많지만,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 ‘외국인 신입사원’에 가깝다는 겁니다.”

강의실 여기저기서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 역시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이 외국인 신입사원에게 일을 제대로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야, 그거 좀 알아서 잘해봐’ 같은 우리 식의 두루뭉술한 언어가 아니라,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지시해야 합니다. ‘어떤 기계가, 어떻게 아프고, 언제부터 아팠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줘야 합니다. 둘째, 그가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정확한 정보와 데이터’를 제공해야 합니다.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소리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공유해야 이 친구도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내놓은 수많은 결과물과 가설 속에서 진짜 ‘정답’을 찾아내는 것은, 결국 수십 년간 현장에서 땀 흘리고 기름 만져온 우리의 ‘경험’과 ‘지혜’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대형 스크린에 띄웠다. “AI는 정답을 바로 알려주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을 수십, 수백 배로 증폭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확성기’이자, 우리의 낡은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주는 가장 정밀한 ‘현미경’입니다. 우리는 AI의 주인이 될 필요도, 노예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서로를 존중하고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면 되는 겁니다.”

그의 강의는 기술 강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동년배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응원이자, ‘나이 듦’이 결코 ‘뒤처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그들의 잃어버린 자부심을 되찾아주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강의가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끝나고, 한기성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의 사무실은 조합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작고 소박한 공간이었다. 화려한 이사장실 대신, 그는 언제든 현장으로 달려 나갈 수 있는 이곳을 고집했다. 그곳에는 그의 오랜 친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고운영책임자(COO)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진 박재혁은, 이제 주식 시세표 대신 전국의 조합 지부 현황과 재무 상태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대시보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사업가적 기질을, 이제는 이윤이 아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쏟아붓고 있었다. “기성아, 방금 대구 지부에서 연락 왔는데, 거기 섬유 공장 20년 된 염색기 문제, 우리 교육생 2기 출신 박영감 팀이 해결했다고 난리 났어. 그 공장 사장님이 감사의 의미로 조합에 발전기금 1억을 기부하겠다고 하네. 허허, 내가 이 나이에 돈 세는 재미에 다시 빠질 줄이야. 근데 예전처럼 공허하지가 않아. 이상하지?”

그의 얼굴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충만함이 가득했다.

현장 지원 총괄 본부장이 된 최민수는, 전국에서 올라온 감사 편지와 함께 배달된 특산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는 강원도에서 보낸 찰옥수수, 제주도에서 보낸 감귤, 전라도에서 보낸 갓김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거 봐라. 강원도 옥수수 농장에서 보낸 찰옥수수, 저번 주에 우리가 트랙터 고쳐준 보답이란다. 제주도 감귤 농장에서는 감귤 한 박스를 보냈어. 야, 이러다 우리 삼시세끼를 전국 팔도 특산물로 다 해결하겠다. 역시 영업은 비싼 술 사주면서 하는 게 아니라, 발로 뛰면서 인심을 얻어야 하는 거야.”

그의 얼굴에는 망해가는 치킨집을 운영할 때의 불안함 대신, 사람들과의 진실된 관계 속에서 얻는 진정한 행복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 고객 만족 및 교육 지원 센터장이 된 이동진은, 새로 들어온 3기 교육생들의 서류를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정리하며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 신입 교육생 한 분이 찾아오셨는데, 얼마 전까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그만두셨다고 하더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이제 죽는 날만 기다려야 하나 싶어 좌절하고 계셨는데, 여기서 다시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돼서 정말 기쁘다고, 내 손을 잡고 눈물까지 글썽이시더라. 내가… 내가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지. 우리 조합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가슴이 뛴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패배감이 없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일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있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그들은 돈이나 명예를 좇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 그 어떤 부자보다도 충만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서는, 이 모든 기적의 숨은 공로자이자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인 오하윤이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DK정밀의 에이스였던 그녀는, KDX 사태 이후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인생 2막 본부’의 기술 연구소장으로 합류했다. 그녀의 결정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이곳이야말로 대한민국 제조업의 ‘미래’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그녀는 이곳에서, MyAISmarteasy를 시니어 세대에게 더욱 최적화하는 연구를 이끌고 있었다. “음성 인식률을 더 높여야 해요. 특히 사투리를 쓰시거나, 발음이 어눌하신 분들도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딥러닝 모델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터페이스는 더 단순하게! 아이콘 크기는 키우고, 텍스트보다는 그림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고민해 봅시다. 우리의 목표는, 스마트폰을 난생 처음 써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돋보기 없이, 자식이나 손주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AI를 만드는 거예요. 기술이 사람을 소외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을 품어야죠.”

그녀는 이제 단순히 뛰어난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기술과 사람을 잇고,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혁신가였다. 그녀의 연구실에는, 전국의 유수 대학에서 그녀의 비전을 보고 모여든 젊고 총명한 인재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시니어 기술자들의 풍부한 현장 경험과 데이터에, 자신들의 최신 IT 기술을 결합하여,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밤낮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기성의 사무실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박정훈. 박재혁의 아들이었다. 그는 이제 홍대의 작은 로봇 카페 사장이 아니었다. 그의 데이터 기반 카페 모델은 국내 최대 규모의 프랜차이지 기업에 거액에 인수되었고, 그는 그 회사의 최연소 ‘미래 전략 본부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방식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했던 과거를 넘어, 아버지의 경험과 자신의 데이터를 결합하는 법을 배운 새로운 세대의 리더였다.

“한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와는 다른, 진심 어린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기성을 바라보았다.

“저희 회사에서, 전국 3천 개 매장의 노후화된 커피 머신과 키오스크를 전면 교체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 현장의 점주님들께서 새로운 기계에 적응하는 것을 굉장히 어려워하십니다. 대부분 저희 아버지 연배이시거든요.”

그는 자신이 준비해 온 사업 계획서를 내밀었다. “그래서… 저희는 이 프로젝트를, ‘시니어 기술 협동조합’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새 기계를 무작정 도입하는 대신, 대표님의 조합에서 저희 기존 기계들을 ‘업그레이드’하고, ‘유지보수’를 전담해 주십시오. 그리고 전국에 계신 조합원들께서, 저희 점주님들을 대상으로 1:1 맞춤 교육을 진행해 주시는 겁니다. 젊은 저희 직원들이 백 마디 설명하는 것보다, 비슷한 연배의 선배님들께서 ‘나도 해봤는데 별거 아니더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저희 프랜차이즈와 조합이 함께 성장하는 ‘상생 모델’이 될 겁니다.”

그것은, 또 다른 세대의 방식으로 건네는 존중과 협력의 제안이었다. 한기성은 박정훈의 계획서를 받아 들고, 그의 아버지 박재혁을 쳐다보았다. 박재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어깨를 툭 쳤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제 서로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최고의 사업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드는 조합의 옥상. 한기성과 세 명의 친구들은 난간에 기댄 채, 자신들이 일군 이 새로운 왕국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물 아래 주차장에서는, 교육을 마친 시니어 교육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새로 배운 기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퇴직의 그늘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동료를 사귀며, 자신의 힘으로 다시 세상에 기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참… 믿기지가 않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나는 망해가는 치킨집에서 한숨만 쉬고 있었는데. 내 인생은 그걸로 끝인 줄 알았지.” 이동진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나는 차가운 아파트 단지를 절뚝거리며 돌고 있었지.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박재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텅 빈 집에서, 돈으로도 채울 수 없는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고. 모든 걸 가졌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었지.”

세 친구의 시선이, 말없이 서 있는 한기성에게로 향했다. 한기성은 먼 곳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내 30년 기술이, 고작 낡은 돋보기안경 없이는 쓸모없어지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내 시간은 이제 멈췄다고, 그렇게 믿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니었어. 우리의 시간은 끝난 게 아니었어. 다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연장이 필요했을 뿐이야. 망치를 쓰던 시대에, 전동 드릴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 우리 네 사람이 함께였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네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자신들의 지난 세월과, 기적처럼 찾아온 지금과,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시간을 말없이 느끼고 있었다.

옥상에서 내려온 한기성의 눈에, 늦게까지 연구실에 불을 밝히고 있는 오하윤과 젊은 연구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젊은 팀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창밖의 한기성을 발견하고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한기성 역시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대한민국이 마주한 거대한 현실이 스쳐 지나갔다. 일할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저출산의 위기. 부양해야 할 사람은 점점 늘어나는 고령화의 비극.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등을 돌렸던 세대 갈등의 깊은 골.

과거의 그는, 이 거대한 문제들 앞에서 그저 스러져 갈 운명인, 힘없는 개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평생의 지혜를 나눈 친구들을 보았다. 그리고 저 창문 너머에서 미래의 기술을 탐구하는 젊은 후배들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손안에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연결해 주는 든든한 파트너, MyAISmarteasy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에 부딪힌 대한민국. 이 거대한 파도 앞에서, 실버 세대의 깊은 경험과 MZ 세대의 빛나는 기술력이 손을 잡고 있었다. 서로 다른 세대가 AI라는 강력한 다리를 통해,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의 팀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한때는 불가능해 보였던 기적. 그들이 함께 만들어나갈 **‘내일의 대한민국’**이었다.

한기성은 더 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과, 그리고 저 젊은 후배들과 함께, AI라는 새로운 돛을 달고 이 거친 바다를 항해해 나갈 것이다.

그때, 그의 스마트폰이 다시 한번 경쾌한 알림음을 냈다. MyAISmarteasy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그것은 그가 몇 달 전, 호기심에 AI에게 던져두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요청하신 ‘전 세계 시니어 기술 현황 및 미래 예측 보고서’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결론: 고령화 사회의 심화로 인해, 숙련된 시니어 엔지니어의 경험과 AI 기술의 결합은, 향후 10년간 가장 폭발적인 성장 잠재력을 가진 시장이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특히,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노후화된 산업 인프라 시장에, ‘한국형 시니어 기술 협동조합 모델’을 적용할 경우,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새로운 과제를 제안하시겠습니까?]

한기성은 친구들에게 AI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친구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대한민국을 넘어, 드넓은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박재혁이 가장 먼저 외쳤다. “이거… 대박인데? 해외 시장이라니! 내가 가진 모든 글로벌 네트워크를 다시 가동할 때가 왔군!” 최민수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좋아! 내 특유의 친화력이면, 베트남이든 인도네시아든 가서 다 친구 먹을 수 있어! 그 나라 말은 이 똑똑한 AI 친구가 통역해주겠지!” 이동진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어디든, 함께라면 갈 수 있다.”

한기성은 친구들을 보며, 다시 한번 환하게 웃었다. 그는 AI의 화면에 떠 있는 [새로운 과제 제안] 버튼을, 망설임 없이 눌렀다.

석양이 지고, 조합의 건물에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한기성과 그의 친구들은 옥상에서 내려와, 새로운 시대를 향해 다시 걸어 나갈 준비를 했다. 그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손주들의 재롱을 보고, 아내와 함께 TV를 보며 평범한 저녁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내일 아침이 되면, 그들은 다시 이곳에 모여, 세상의 가장 낡고 소외된 곳을 향해 출동할 것이다. 그들의 낡은 승합차는, 이제 세상을 바꾸는 가장 뜨거운 심장을 싣고 달릴 터였다.

저 멀리,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네 명의 중년 남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세월이 내려앉아 하얗게 센 머리카락. 하지만 그 머리카락은 더 이상 쇠락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의 지혜와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그 어떤 젊음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왕관’이었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더 이상 위태롭거나 지쳐 있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당당히 선 노장들의 발걸음은, 그 어떤 청년의 발걸음보다도 힘차고 당당했다. 석양의 마지막 빛이 그들의 흰 머리카락을 비추자, 마치 후광처럼 눈부시게 흩날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현역(現役)이었다.


 

 

2권. <현역의 조건: AI, 그리고 마지막 싸움>

[제1화] 금이 간 일상

1년 후, 봄. 시간은 낡은 것을 지우고, 새로운 것을 피워내는 마법사였다. 경기도 외곽의 쇠락해가던 공단 지역. 그곳에 흉물처럼 버려져 있던 낡은 창고는, 이제 주변의 풍경을 환하게 밝히는 등대 같은 건물이 되어 있었다. 세련되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현판에는, 힘찬 서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단법인 시니어 기술 협동조합 – 인생 2막 본부]

과거 ‘인생 2막 기술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네 친구의 허름한 사무실은, 이제 대한민국 산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적 기업이자, 수많은 퇴직 기술자들의 새로운 희망의 메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작은 날갯짓은, 이제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태풍의 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성공의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 또한 짙어지는 법이었다. 오늘, 조합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사회실의 공기는, 봄날의 따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공이 가져다준 자신감과, 그 성공 너머를 향한 야심이 팽팽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회의를 주도하는 것은, 완벽한 맞춤 슈트 차림으로 돌아온 ‘사업가’ 박재혁이었다. 그의 앞에는, 대형 스크린을 가득 채운 화상 회의 화면 속에서, 실리콘밸리의 젊은 천재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인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러분, 소개합니다. ‘알파 프론티어 캐피탈’의 대표, 레오 강입니다. 이 친구가 바로, 우리 조합의 자산을 잠에서 깨워줄 최고의 파트너입니다.”

박재혁의 목소리에는, 마치 거대한 계약을 성사시키기 직전의 CEO처럼, 흥분과 확신이 가득했다. 그는 화려한 그래프와 현란한 데이터가 담긴 프레젠테이션을 화면에 띄웠다.

“우리는 지난 1년간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봐야 합니다. 조합의 운영 자금과, 우리 조합원들이 평생을 바쳐 모은 소중한 은퇴 자금은, 여전히 연 1% 남짓한 은행 예금에 잠자고 있습니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사실상 마이너스입니다. 이래서는 진정한 의미의 안정된 노후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는 화면 속의 젊은 천재, 레오 강을 가리켰다. “레오 강의 AI 투자 알고리즘은, 인간의 탐욕과 공포라는 가장 큰 리스크를 원천적으로 배제합니다. 24시간, 365일, 전 세계 금융 시장의 모든 데이터를 분석하여, 99.9%의 확률로 가장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자산에만 분산 투자합니다. 제가 그의 투자 알고리즘 백서를 석 달간 밤을 새워가며 직접 검토해 봤는데, 한마디로 완벽합니다. 단 하나의 감정적 오류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데이터와 확률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기술 현장의 전문가라면, 이 친구는 금융 현장의 전문가입니다. 이제 우리도, 이 자산을 더 스마트하게 관리해야 할 때입니다.”

그의 제안에, 회의에 참석한 다른 이사들과 친구들의 눈이 반짝였다. 특히, 평생을 돈 걱정하며 살아온 최민수와 이동진에게는, 박재혁의 말이 마치 복음처럼 들렸다.

“연… 연 15% 이상이라고? 은행 이자의 거의 열 배잖아!” 최민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그 숫자 위로, 더 이상 치킨 기름 냄새에 찌들지 않고 아내와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고생했어, 여보.’ 이 말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정말… 그렇게 안정적이라면…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노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건가….” 이동진의 목소리에 간절한 희망이 묻어 나왔다. 그는 다시는 과거의 비참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며 겪었던 수모, 무시당했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오직 한기성만이, 그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홀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회의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종이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박재혁의 완벽한 논리에서, 어딘지 모르게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쉬웠고, 너무 완벽했다. 마치 모든 수치가 정상인데도, 어디선가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미세한 고주파 소음이 들려오는 낡은 기계처럼.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 컵을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오른손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주 미세하게, 남들은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떨려왔다. 종이컵의 표면이 파르르 떨리며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커피가 종이컵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렸다.

‘…또 시작이군.’

최근 들어 점점 더 잦아지고 있는 증상이었다. 그는 황급히 왼손으로 오른손을 덮어, 마치 추운 듯 손을 감싸 쥐며 떨림을 억지로 짓눌렀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왼손으로 컵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다행히 회의에 집중한 친구들은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한기성은 알았다. 자신의 몸이라는 가장 믿었던 기계에, 원인 모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치명적인 오류의 전조 증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친구들이 열광하는 저 ‘완벽한 투자 계획’ 역시, 거대한 균열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입을 열어 반대하려 했다. ‘재혁아,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어. 이건 너무 위험해 보여.’ 이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금융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자신의 ‘감’은, 친구의 완벽한 ‘데이터’ 앞에서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몸 상태가, 그의 자신감을 좀먹고 있었다.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늙은이가, 친구들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을 자격이 있을까.

결국, 조합의 여유 자금과, 희망하는 조합원들의 개인 은퇴 자금을 모아 ‘알파 프론티어 캐피탈’에 투자하는 안건은, 그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모두의 열광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마침내 안정된 미래를 손에 쥐었다는 환한 희망이 가득했다. 한기성은 그 모습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성공 신화라는 가장 단단해 보이는 일상에, 그렇게 첫 번째 금이 가고 있었다.


며칠 후, 한기성은 아내 혜숙 몰래 동네의 작은 신경외과를 찾았다. 손 떨림 증상은 그의 일상을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이제는 아침에 셔츠의 단추를 채우는 것도, 국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드는 것도 몇 번의 심호흡이 필요했다. 그는 마치 성실했던 기계가 예고 없이 오작동을 일으키듯, 자신의 몸이 낯설게 느껴졌다.

의사는 몇 가지 검사를 마친 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진단을, 너무나도 차분하고 사무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초기 파킨슨병으로 보입니다. 뇌의 흑질이라는 부위에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분비하는 세포가 서서히 죽어가는 퇴행성 뇌 질환입니다. 아직은 초기 단계라 약물 치료로 증상을 상당히 조절할 수 있습니다만, 완치는… 현재 의학으로는 어렵습니다.”

파킨슨병. 한기성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TV 드라마 속의 비극적인 병명처럼 느껴졌던 그 단어가, 이제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어 자신의 이름 앞에 붙어버렸다.

의사는 약물 처방전과 함께, 앞으로 그가 겪게 될 일들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설명했다. 마치 고장 난 기계의 사용 설명서를 읽어주듯이. 손 떨림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고, 걸음걸이는 느려지고, 몸은 뻣뻣하게 굳어갈 것이다. 얼굴의 표정은 사라지고, 말은 어눌해질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식사를 하거나, 옷을 입거나, 심지어 돌아눕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절망적인 예언.

병원을 나오는 한기성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는 병원 앞 벤치에 주저앉아, 힘없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30년간 그의 손은, 그 자신이었다. 복잡한 기계를 분해하고, 미세한 부품을 조립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그의 자부심이었고,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손이 자신의 의지를 배신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렌치와 드라이버를 능숙하게 다룰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현장에서, 동료들 앞에서, 당당한 기술자로 설 수 없을 것이다.

‘현역’의 자격을 잃는다는 것. 그것은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다. 그는 이제, 자신이 평생을 고쳐왔던, 서서히 멈춰가는 낡은 기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이제 막 새로운 희망을 찾고 미래를 설계하는 친구들에게, 그리고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로 믿고 있는 아내에게, 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날부터, 자신의 병을 숨기기 위한 외롭고 처절한 싸움을 시작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일부러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거나, 왼손을 더 많이 사용했다. 누군가 떨리는 손에 대해 물으면, “아, 이거? 나이 드니 수전증이 오나 봐”라며 애써 태연하게 웃어넘겼다.

그리고 혼자가 되면,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이나, 어두운 차 안에서, 멋대로 떨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소리 없는 눈물을 삼켰다. 그의 인생 2막에 드리워진 첫 번째 그림자는, 그렇게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두 번째 그림자가, 그의 친구들과 조합 전체를 집어삼키기 위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그날 아침은 유독 화창했다. 조합원들은 ‘알파 프론티어 캐피탈’의 투자 수익률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는 소식에,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박재혁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며 의기양양했고, 최민수와 이동진은 벌써부터 은퇴 후의 삶을 계획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바로 그때, 박재혁의 책상 위에 있던 태블릿 PC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그가 매일 아침 확인하던 ‘알파 프론티어 캐피탈’의 투자 현황 페이지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페이지가 열리지 않았다.

“어? 서버가 이상한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페이지를 새로고침했다. 여전히 페이지는 하얗게 비어 있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털 사이트에서 ‘알파 프론티어 캐피탈’을 검색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관련 뉴스와 기사, 심지어 회사 홈페이지 링크까지, 어제까지 분명히 존재했던 모든 것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레오 강의 번호를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차가운 기계음이, 그의 마지막 희망을 끊어버렸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사무실을 뛰쳐나와, 차를 몰아 강남의 최고급 빌딩에 위치했던 레오 강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화려한 로고와 최고급 가구, 최첨단 모니터들이 있던 그 공간은, 싸늘한 콘크리트 벽과 바닥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사기였다. 최첨단 AI를 이용한 폰지 사기. 레오 강은 처음부터 그들의 노후 자금을 노린 사기꾼이었다. 그가 보여준 화려한 이력과 완벽해 보였던 알고리즘은, 모두 시니어 세대의 불안 심리를 파고들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신기루에 불과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박재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텅 빈 눈으로 친구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얼굴을 본 친구들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최민수는 자신의 투자 원금, 평생 모은 3억 원이, 아니, 아내와의 꿈과 미래가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오열했다. “내 돈… 내 피 같은 돈… 이제 우리 마누라 얼굴을 어떻게 보나…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이동진은 아무 말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그저 텅 빈 눈으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렵게 되찾았던 삶의 희망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의 침묵은, 그 어떤 절규보다도 더 깊은 절망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박재혁. 그는 자신의 판단이 모든 것을 망쳤다는 죄책감과, 평생의 자부심이었던 금융 지식이 한낱 사기꾼에게 농락당했다는 수치심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안하다. 다… 다 내 잘못이다. 내가… 내가 죽일 놈이다.”

친구들 사이의 신뢰에, 회복할 수 없는 깊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원망과 자책, 그리고 절망. ‘인생 2막 본부’의 사무실은, 이제 그 어떤 곳보다도 깊고 어두운 지옥이 되어 있었다.

한기성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떨리는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의 몸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과, 친구들의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절망. 두 개의 거대한 폭풍이, 그의 남은 인생을 향해 동시에 몰아치고 있었다.

그의 진짜 ‘마지막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제2화] 잿더미 속의 불씨

성공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데는, 단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알파 프론티어 캐피탈’의 사기 사건이 터진 다음 날, ‘인생 2막 본부’의 사무실은 더 이상 희망의 요람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제, 네 명의 중년 남자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차가운 폐허이자 침묵의 무덤이었다.

전화벨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따뜻한 격려와 새로운 의뢰 대신, 조합원들의 울분 섞인 항의 전화가 빗발치다, 이내 그것마저 끊겼다. 세상은 성공에는 환호하지만, 실패에는 냉담했다. 한때 그들을 영웅처럼 치켜세웠던 언론은, 이제 ‘시니어 투자 사기 사건’의 어리석은 피해자들이라며 조롱 섞인 기사를 쏟아냈다.

그 침묵의 무게를 가장 견디기 힘들어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말이 많았던 최민수였다. 그는 며칠 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무실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재혁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박재혁은 며칠째 잠 한숨 못 잔 사람처럼, 텅 빈 눈으로 노트북의 법률 자문 페이지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야, 박재혁.” 최민수의 목소리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처럼 거칠고 날카로웠다.

박재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왜.”

“너는… 너는 지금 이게 아무렇지도 않냐? 네가 전문가라며! 네가 과학이라며! 네 그 잘난 주둥이 하나 믿고, 나는… 나는 내 평생을 바친 돈을 쏟아부었어! 우리 마누라가, 시집올 때 해온 금반지까지 팔아서 보태준 돈이라고, 이 개자식아!”

그의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박재혁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는, 40년이라는 우정의 세월이 마지막 방패처럼 놓여 있었다.

박재혁은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내가 죽일 놈이다. 변호사랑 이야기 중이야. 어떻게든….”

“변호사? 이제 와서 변호사가 뭘 할 수 있는데! 그 새파란 사기꾼 놈은 이미 저 세상으로 날랐을 텐데! 너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지. 늘 최고급 양복 입고, 비싼 차 타고, 어려운 문제는 돈으로 사람 써서 해결하고! 우리는 너 같은 놈들이랑 달라! 우리는 한 푼 두 푼 모아서, 이 손으로, 이 땀으로, 우리 가족들 먹여 살려온 사람들이라고! 네가 우리의 인생을 알아?”

최민수의 절규는, 박재혁을 향한 원망이자, 한순간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지독한 혐오였다. 그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공구 가방을 챙겨 들고, 사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갔다.

“나, 오늘부로 여긴 그만둔다. 너희 같은 부자 놈들이랑 상종 안 해. 나는 다시 내 치킨 가게로 돌아가서, 내 방식대로 살란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는,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최민수가 떠나고, 이동진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매일같이 정성스럽게 닦고 조였던 사무실의 공구들을, 마지막으로 한번 쓸어보았다. 그리고는 한기성의 책상 위에, 자신이 마시던 믹스 커피 값이라며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을 올려놓고,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은, 다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던 시절의 그늘진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사무실에는 이제 한기성과 박재혁,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박재혁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자신이 짊어진 죄책감의 무게에 완전히 짓눌려 있었다.

한기성은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오른손이, 또다시 저릿하며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친구들의 인생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조차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이후, 사무실은 텅 비었다. 박재혁은 변호사 사무실을 전전하며 법적 해결책을 찾으려 애썼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레오 강은 처음부터 유령 같은 존재였다. 차명 계좌와 대포폰, 해외의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한 그의 자금 흐름은, 그 어떤 전문가도 추적하기 힘들었다.

한기성은 홀로 텅 빈 사무실을 지켰다. 그는 무너진 친구들에게 차마 연락할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아침,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삼키며,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리고는 MyAISmarteasy를 켜고, 의미 없는 데이터들을 분석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무력함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절망의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오후였다. 한기성이 홀로 사무실 소파에 앉아, 멋대로 떨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을 먹어도,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증상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꽉 쥐어보았지만, 마치 다른 생명체처럼 손은 그의 의지를 벗어나 떨고 있었다.

‘이제… 정말 끝인가.’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바로 그 순간.

똑똑-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기성은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오하윤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결의가 뒤섞여 있었다.

“선배님….” “하윤 씨? 여긴 어쩐 일로….”

오하윤은 사무실 안의 스산한 풍경과, 한기성의 지친 얼굴, 그리고 그가 황급히 등 뒤로 감추는 떨리는 오른손을 보고, 모든 것을 짐작했다는 듯 조용히 말했다. “소문 들었어요. 그리고… 뭔가 제가 도울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DK정밀에 사표를 낸 뒤, 카이스트의 AI 연구소에 스카우트되어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어엿한 대한민국 AI 업계의 차세대 리더였다.

한기성은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였다. “괜찮아. 다 끝난 일인데 뭐.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선배님.” 오하윤은 그의 변명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그의 떨리는 손을 외면하지 않았다. “괜찮지 않으시잖아요.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는 자신이 들고 온 노트북을 열어, 한기성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에는, 익숙한 MyAISmarteasy의 로고가 떠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로고 아래에는 ‘Ver 2.0 – The Detective’라는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저희 연구소에서 MyAISmarteasy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개발했어요. 기존의 ‘엔지니어’ 모델을 넘어, 이제는 새로운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진화했죠. 바로… ‘탐정’ 기능이에요.”

그녀는 화면을 조작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모델은, 전 세계에서 발생한 수만 건의 금융 사기 사건 패턴을 딥러닝으로 학습했어요. 그리고 용의자의 디지털 흔적, 즉 이메일, SNS, 가상화폐 거래 기록, 다크웹 활동까지 추적할 수 있는 ‘디지털 포렌식 시스템’을 탑재했죠. 물론,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공개된 데이터를 통해서만요.”

한기성은 멍하니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선배님. 레오 강이라는 그 사기꾼, 어쩌면 완벽한 유령은 아닐지도 몰라요. 아무리 지우려 해도, 디지털 세상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게 되어 있으니까요. 우리… 그 흔적, 한번 찾아보지 않을래요?”

오하윤의 제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발견한 단 하나의 성냥불 같았다. 한기성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사기 사건의 유일한 단서였던 ‘알파 프론티어 캐피탈’의 투자 제안서를 AI에게 스캔시켰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금융 사기 패턴’ 대조 및 ‘디지털 워터마크’ 추적 중…]

몇 분간의 분석이 끝나고, 화면에 작은 결과 하나가 떠올랐다.

[분석 결과: 투자 제안서 파일의 메타데이터에서, 아주 희미하게 변조된 ‘디지털 워터마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워터마크는 3년 전, 홍콩에서 활동했던 한 유사수신 업체가 사용했던 것과 87% 일치합니다. 해당 업체의 배후 인물이었던 ‘존 킴(John Kim)’의 현재 소재지는…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결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0’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보이지 않던 적의 실루엣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날 밤, 한기성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이 작은 실마리를 들고, 흩어진 친구들을 다시 모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들의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그는 가장 먼저, 가장 약한 고리인 이동진을 찾아갔다. 이동진은 자신의 작은 원룸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한기성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기성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옆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는 AI의 분석 화면을 보여주었다. “동진아.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범인의 꼬리가… 아주 조금 잡혔어.”

이동진은 한참 동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텅 비었던 눈동자에, 아주 희미한 빛이, 마치 꺼져가던 잿더미 속의 불씨처럼 되살아나는 듯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최민수의 치킨 가게였다. 가게는 문을 닫았고, 아내와의 다툼 소리가 문밖까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기성은 문이 열리기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문을 열고 나온 최민수의 얼굴은 수척했다. 그는 한기성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여긴 왜 왔어! 또 희망 고문이라도 하려고?”

한기성은 그의 분노를 묵묵히 받아내며, 노트북을 열었다. “민수야, 네 분노, 네 원망, 다 알아. 나한테 다 풀어도 좋아. 하지만 이거 하나만 봐줘. 우리는…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네 돈, 내 돈, 우리 모두의 돈을 훔쳐 간 그놈, 내 손으로 잡아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그러려면 네 힘이 필요해. 너의 그 발로 뛰는 정보력이.”

최민수는 한참이나 한기성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맺힌 것은 분노의 눈물이자, 억울함의 눈물이었다. 그는 결국,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심은, 때로 절망보다 강한 동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박재혁의 집이었다. 그는 집안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었다. 한기성은 그의 집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문을 열고 나온 박재혁은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 “……가라, 기성아. 나는… 너희를 볼 면목이 없다. 모든 게 내 책임이야. 나는 더 이상 너희 앞에 설 자격이 없어.”

한기성은 그의 멱살을 잡고 싶을 정도의 분노를 억누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박재혁! 정신 차려!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숨어서 자책하는 게 아니야. 네가 저지른 실수를, 네 손으로 책임지는 거라고!”

그는 노트북을 들이밀었다. “이거 봐. 범인의 실마리를 잡았어. 하지만 저놈은 보통 놈이 아니야. 법과 금융 시스템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지능범이야. 저놈을 잡으려면, 네가 평생을 바쳐 쌓아온 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해.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이것이, 네가 우리에게 진 빚을 갚고, 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박재혁은 흔들리는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전문 분야, 그가 가장 잘 아는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잠들어 있던 사업가의 본능이, 엔지니어의 분석력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인생 2막 본부’의 텅 비었던 사무실에, 세 명의 남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최민수, 이동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재혁.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상처와 어색함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이전과는 다른, 차갑고도 결연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한기성은 그들 앞에 섰다.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조금씩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다들 와줘서 고맙다.”

그는 사무실 중앙의 화이트보드에, AI가 찾아낸 ‘존 킴(John Kim)’이라는 이름을 크게 적었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이 유령을 찾아내는 것이다.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재혁이 너는 금융 전문가로서, 이놈의 자금 흐름을 역추적한다. 민수 너는 정보원으로서, 네 모든 인맥을 동원해 이놈의 과거 행적을 파헤친다. 동진이 너는 우리 팀의 살림을 맡아, 모든 정보를 정리하고 분석하며 우리가 놓치는 게 없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나는… 이 녀석과 함께, 이 모든 작전을 지휘한다.”

그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네 명의 친구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우정은 금이 갔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그들의 희망은 재가 되었지만, 꺼지지는 않았다.

잿더미 속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현역’들의 마지막 싸움, 그 반격의 서막이, 마침내 오르고 있었다.


 

[제3화] 유령의 그림자

다음 날 아침, ‘인생 2막 본부’의 사무실은 더 이상 패배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제, 모든 것을 잃은 자들이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는 비장한 전쟁 상황실로 변해 있었다. 어젯밤의 어색함과 원망은, ‘레오 강’이라는 공동의 적을 향한 차가운 분노 아래 잠시 억눌려 있었다.

사무실 중앙의 거대한 화이트보드에는, 한기성이 쓴 ‘존 킴(John Kim)’이라는 이름이, 마치 현상 수배범의 이름처럼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네 친구의 이름과 각자의 역할이 명시되어 있었다.

  • 총괄 지휘 (PM): 한기성
  • 금융 분석팀: 박재혁
  • 현장 정보팀: 최민수
  • 데이터 지원팀: 이동진

이것은 그들이 처음 회사를 세웠을 때의 역할 분담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은 절박함과 복수심으로 뭉쳐 있었다.

한기성은 떨리는 오른손을 애써 감추며,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우리의 적은 유령이야. 실체도, 이름도, 얼굴도 정확하지 않아. 우리가 가진 단서는 딱 두 개. ‘존 킴’이라는 3년 전 홍콩의 사기꾼 이름과, 그놈이 이번에 사용한 ‘알파 프론티어 캐피탈’이라는 유령 회사뿐이다. 우리는 이 두 개의 점을 연결해서, 놈의 진짜 얼굴을 찾아내야 해.”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각자 맡은 임무를 시작한다. 재혁이 너는 금융 전문가로서, 알파 프론티어 캐피탈의 자금 흐름을 역추적한다. 놈들이 우리 돈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단 한 푼이라도 놓치지 말고 찾아내. 민수 너는 정보원으로서, 네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우리가 아는 유일한 물리적 공간, 즉 강남의 그 텅 빈 사무실 주변을 탐문한다. 건물 관리인이든, 옆 가게 주인이든, 뭐라도 좋아. 놈들이 남긴 아주 작은 ‘사람의 흔적’이라도 찾아내. 동진이 너는 우리 팀의 살림을 맡아, 재혁이와 민수가 가져오는 모든 정보를 정리하고, 교차 분석하며 우리가 놓치는 게 없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나는… 이 녀석과 함께, 이 모든 작전을 지휘하고, 여러분이 가져온 정보의 의미를 해석할 거야.”

그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네 명의 친구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어제의 원망은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기 위한 전사들의 비장한 빛만이 감돌고 있었다.


가장 먼저 벽에 부딪힌 것은 박재혁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걸고, 레오 강의 자금 흐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금융 지식과, 과거 대기업 시절의 인맥까지 총동원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거대하고 촘촘하게 짜인 거미줄 같은 디지털 금융의 미로였다.

레오 강은 천재였다. 악마적인 천재. 조합의 자금은 국내 계좌에 머문 지 단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수십 개의 대포 통장으로 쪼개져 흩어졌다. 그리고 그 돈은 다시, 조세 피난처에 위치한 수백 개의 유령 회사(페이퍼 컴퍼니)로 송금되었다. 그 유령 회사들의 이름은 ‘블루 오션 인베스트먼트’, ‘골든 트리 홀딩스’ 등, 그럴듯했지만 실체는 없었다.

박재혁은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그 흐름을 쫓았지만, 결국 모든 돈이 하나의 지점에서 증발해버린 것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했다. “……크립토(Crypto). 이 새끼, 전부 다 가상화폐로 바꿔서 빼돌렸어.”

그는 허탈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가상화폐. 그것은 현대 금융 시스템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익명의 동굴이었다. 수사 기관조차 추적이 거의 불가능한 그곳에서, 그는 길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었다. 평생을 금융 전문가로 살아온 자신의 지식이, 이 신종 범죄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케 했다. 그는 한기성에게 차마 실패했다는 보고를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홀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다. 하지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는 거대한 안갯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뿐이었다.


같은 시각, 최민수는 강남의 빌딩 숲을 헤매고 있었다. 그는 레오 강의 유령 회사가 있었던 최고급 빌딩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역시 거대한 벽에 부딪혔다.

“글쎄요, 워낙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기억이 잘….” 빌딩의 보안 책임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CCTV요? 경찰 영장 없이는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두 달 전 기록은 다 지워졌을걸요.”

그는 주변의 카페, 편의점, 식당을 샅샅이 뒤졌지만, 레오 강이나 그의 직원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젠장, 진짜 유령이라도 만난 기분이네.” 최민수는 며칠간의 허탕에 지쳐, 빌딩 앞 공원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의 방식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평생을 시장 바닥에서 사람 얼굴 맞대고 장사해 온 사람이다. 이런 세련되고 익명적인 도시의 빌딩 숲은, 그에게 너무나도 낯선 정글이었다.

그가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눈에, 빌딩 지하 주차장에서 나오는 음식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들어왔다. ‘그래, 저거다!’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아무리 유령 같은 놈들이라도, 밥은 먹고 살았을 터. 그는 곧장 빌딩 지하의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그리고는 경비 반장에게 자신이 미리 준비해 온 비타민 음료 한 박스를 건네며,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반장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제가 이 근처에서 작은 식당을 하는데, 여기 사무실들 단체 도시락 주문 좀 받아볼까 해서요. 혹시, 저기 17층에 있던 ‘알파’ 뭐시깽이 회사는, 주로 어디서 밥 시켜 먹었는지 아십니까? 제가 그 회사 사장님이랑 좀 아는 사이라서….”

그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뇌물(?)에, 경비 반장은 경계심을 풀고 입을 열었다. “아아, 그 회사. 젊은 양반들만 있던. 거기는 늘 한 군데서만 시켜 먹던데. ‘셰프의 도시락’이라고, 프리미엄 도시락 업체. 워낙 비싼 도시락만 시켜 먹어서 내가 기억하지.”

최민수는 마침내, 유령이 남긴 첫 번째 ‘쓰레기’를 찾아냈다. 그는 곧장 ‘셰프의 도시락’ 본사로 찾아가, 17층 사무실의 과거 주문 기록을 볼 수 있겠냐고 물었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단칼에 거절당했다.

결국 그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사무실에 돌아온 두 친구의 얼굴에는 패배의 그림자가 짙었다. 한기성은 그들의 보고를 묵묵히 들었다. 그는 친구들을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실패는 예상했던 바였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 유령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을 자신의 컴퓨터 앞으로 불렀다. “둘 다 고생했다. 이제부터는, 우리 파트너가 일할 시간이야.”

그는 먼저, 박재혁을 보며 말했다. “재혁아. 네가 추적한 모든 자금 흐름 데이터를 이 녀석에게 입력해. 네가 놓친 것, 네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이 녀석은 찾아낼 거야.”

박재혁은 반신반의하며, 자신이 며칠간 정리한 수백 개의 유령 회사와 지갑 주소 데이터를 MyAISmarteasy에게 넘겼다. AI는 그 방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흡수하고, 시각화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수백 개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거미줄이 그려졌다. [자금 흐름 네트워크 분석을 시작합니다. ‘비정상 거래 패턴’ 및 ‘노드 간 연결 고리’ 탐색 중…]

AI는 박재혁이 길을 잃었던 그 지점, 즉 돈이 가상화폐로 바뀐 그 순간부터 역추적을 시작했다. [분석 결과, 대부분의 자금은 ‘믹싱 서비스’를 통해 세탁되어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전체 거래량의 0.01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금액이, 세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제3의 전자지갑으로 바로 송금된 패턴이 8차례 발견되었습니다.]

박재혁의 눈이 커졌다. 0.012%.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너무나 사소해서 무시했을 법한 거래.

[이 전자지갑(0x749…a8d3)은, 동남아시아 기반의 P2P 가상화폐 거래소 ‘크립토링크(CryptoLink)’에 등록된 지갑입니다. 이 거래소는 KYC(신원 인증) 절차가 허술하여, 범죄에 자주 이용되는 곳입니다.]

AI는 거미줄처럼 얽힌 수백 개의 선들 속에서, 단 하나의 끊어질 듯 가느다란 연결고리를 찾아낸 것이다. 박재혁은 전율했다. 이것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배운 금융 지식의 세계를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분석이었다.

다음은 최민수의 차례였다. 한기성은 그를 보며 말했다. “민수야. 네가 알아낸 ‘셰프의 도시락’이라는 정보, 아주 중요한 단서야. 이제 이 단서에 생명을 불어넣어 보자.”

그는 AI에게 명령했다. ‘소셜 미디어 및 공개 데이터베이스 분석 시작. 검색어: “셰프의 도시락”, “알파 프론티어”. 기간: 최근 6개월. 두 키워드가 동시에 언급된 모든 게시물을 찾아내.’

AI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수십만 건의 데이터를 샅샅이 뒤진 끝에, 단 하나의 게시물을 찾아냈다.

그것은 한 음식 전문 블로거가 3개월 전에 올린 포스팅이었다. [‘요즘 강남 직장인들 사이에서 핫하다는 #셰프의도시락 #프리미엄도시락 후기! 오늘은 운 좋게 #알파프론티어 회사 분들이 단체 주문한 덕에, 특별 메뉴를 맛볼 수 있었네요! 역시 비싼 건 달라! #강남맛집’]

그리고 그 포스팅의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 리스트. 그 수백 명의 아이디 속에서, AI는 특정 패턴을 가진 하나의 아이디를 지목했다.

[ID: ‘Leo_Blueocean_88’. ‘알파 프론티어’의 다른 이름 중 하나였던 ‘블루 오션 인베스트먼트’와 연관성이 의심됨. 이 아이디의 다른 활동을 추적합니다.]

AI는 순식간에 해당 아이디가 남긴 모든 디지털 흔적을 긁어모았다. 다른 블로그에 남긴 댓글, 사진 공유 사이트에 올린 사진들, 그리고…

[결정적 정보 발견. 해당 아이디는 4개월 전, 가상화폐 투자 포럼에 “크립토링크 거래소 사용 후기”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게시물에, 자신의 수익률을 인증하기 위해 전자지갑 주소의 일부를 스크린샷으로 첨부했습니다. 그 주소는… ‘0x749…a8d3’입니다.]

순간, 사무실 안의 모든 공기가 멈췄다. 박재혁이 찾아낸 자금의 종착지와, 최민수가 찾아낸 사람의 흔적이, AI의 분석을 통해 하나의 지점에서 완벽하게 만난 것이다.

유령의 꼬리가, 드디어 잡혔다.

한기성은 떨리는 손으로 화이트보드에 새로운 정보를 적어 내려갔다. ‘용의자 Alias: Leo_Blueocean_88’ ‘자금 은닉처: 크립토링크 거래소’

그는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최민수의 얼굴에는 분노 대신, 사냥개의 집요한 흥분이 감돌고 있었다. 박재혁의 얼굴에는 죄책감 대신, 자신의 전문성으로 반격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전율이 흐르고 있었다. 이동진은 말없이, 친구들에게 따뜻한 커피를 새로 타주고 있었다.

한기성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여전히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손이 렌치를 잡을 수 없다면, 이 AI라는 새로운 손으로, 유령의 목을 조이면 되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2단계 작전을 시작한다.” 한기성의 목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우리의 목표는, 이 ‘Leo_Blueocean_88’이라는 유령의 진짜 얼굴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싸움은, 이제 막 진짜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제4화] 사냥의 시작

다음 날 아침, ‘인생 2막 본부’의 사무실 공기는 전날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절망과 무력감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이제 사냥을 앞둔 늙은 늑대들의 차가운 투지와 비장함이 감돌았다. 사무실 중앙의 거대한 화이트보드. 그 위에는 ‘존 킴(John Kim)’이라는 이름 옆에, ‘Leo_Blueocean_88’이라는 새로운 별칭과 ‘크립토링크 거래소’라는 단서가, 마치 적의 좌표처럼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한기성은 떨리는 오른손을 잠시 주무르며,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우리의 적은 유령이야. 실체도, 이름도, 얼굴도 정확하지 않아. 하지만 이제, 녀석이 남긴 희미한 그림자를 찾아냈어. 우리는 이 두 개의 점, 즉 가상의 닉네임과 자금의 종착지를 연결해서, 놈의 진짜 얼굴을 찾아내야 해.”

그는 화이트보드에 새로운 작전 단계를 써 내려갔다. [2단계 작전: 유령의 실체화 (De-Anonymization)]

“각자 맡은 임무를 시작한다. 재혁이 너는 금융 전문가로서, ‘크립토링크’라는 거래소의 모든 것을 파헤쳐. 그놈들이 어떤 방식으로 KYC(신원 인증)를 우회하는지, 자금 세탁의 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법적인 허점은 무엇인지. 우리는 적의 ‘전장’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해.”

“민수 너는 정보원으로서, 이제 타겟을 바꿔. ‘셰프의 도시락’이라는 단서를 물고 늘어져. 그 유령 회사에서 일했던 놈들도 결국은 사람이야. 밥을 먹고, 쓰레기를 버리고, 흔적을 남기지. 그 도시락 업체 주변에서, 놈들이 남긴 아주 작은 ‘사람의 흔적’이라도 찾아내. 그놈들이 주로 주문했던 메뉴, 배달 시간, 결제 방식까지. 사소한 습관이 놈의 정체를 드러낼 거야.”

“동진이 너는 우리 팀의 심장이자 두뇌야. 재혁이와 민수가 가져오는 모든 조각난 정보들을, 이 화이트보드 위에 하나의 거대한 지도로 그려줘. 시간대별로, 장소별로, 모든 것을 연결하고, 우리가 놓치는 모순이나 이상한 점이 없는지 매의 눈으로 확인해. 그리고 나는… 이 녀석과 함께, 그 지도의 의미를 해석하고, 다음 공격 지점을 찾아낼 거야.”

그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네 명의 친구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어제의 원망은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기 위한 전사들의 비장한 빛만이 감돌고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박재혁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걸고, ‘크립토링크’라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금융 전문가, 심지어 과거에는 경쟁자였던 이들에게까지 고개를 숙이며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그가 평생을 몸담았던 제도권 금융과는 완전히 다른, 무법의 정글이었다. ‘크립토링크’는 동남아시아의 작은 섬나라에 서버를 둔, 사실상 유령 거래소였다. 그곳은 KYC 절차가 거의 없어, 전 세계의 검은 돈이 모여드는 거대한 세탁소나 다름없었다.

박재혁은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그 거래소의 구조를 분석했다. 그는 AI의 도움을 받아, 거래소의 코드를 역으로 분석하고, 수백만 건의 공개된 거래(Transaction) 데이터를 시각화했다. 그는 비트코인의 흐름을 쫓으며, 레오 강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 어떻게 수천, 수만 개의 다른 지갑으로 쪼개져 흩어지는지를 지켜보았다.

그는 허탈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건, 강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그 잉크 입자를 다시 찾아내라는 것과 똑같아. 불가능해.”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었다. 평생을 금융 전문가로 살아온 자신의 지식이, 이 신종 범죄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케 했다. 그는 한기성에게 차마 실패했다는 보고를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홀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다. 하지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는 거대한 안갯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뿐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 한기성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재혁아, 숲 전체를 보려 하지 마. 지금은 우리가 아는 단 하나의 ‘나무’에만 집중하는 거야. 바로 ‘Leo_Blueocean_88’이라는 놈이, 수익률을 인증하기 위해 올렸던 그 ‘스크린샷’ 말이야.”

한기성은 MyAISmarteasy를 이용해, 그 작은 스크린샷 이미지를 픽셀 단위로 확대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미지 심층 분석 시작. 촬영된 기기의 종류, 운영체제, 해상도, 사용된 폰트 등, 모든 메타데이터를 역추적합니다.]

잠시 후, 놀라운 결과가 화면에 떠올랐다. [분석 결과, 해당 스크린샷은 ‘iOS 15.2’ 버전이 설치된 아이폰 13 Pro Max에서 촬영되었을 확률이 98.7%입니다. 또한, 화면 우측 상단에 표시된 통신사 로고는, ‘홍콩 텔레콤(HKT)’의 5G 로고와 일치합니다.]

“홍콩…?” 박재혁의 눈이 커졌다. 3년 전, ‘존 킴’이라는 이름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이 자식, 홍콩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박재혁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제 그의 목표는 더 이상 막연한 자금 추적이 아니었다. ‘홍콩’, ‘아이폰’, ‘HKT 통신사’. 구체적인 타겟이 생긴 것이다. 그는 홍콩의 금융 법규와 가상화폐 규제에 대해 미친 듯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최민수는 강남의 빌딩 숲을 다시 헤매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정문만 맴돌지 않았다. 그의 새로운 타겟은, 빌딩 주변을 쉴 새 없이 오가는 ‘음식 배달 라이더’들이었다.

그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들의 휴식 공간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지친 라이더들에게 시원한 박카스를 돌리고,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그들의 고된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고, 형씨. 뭘 이런 걸 다….” “힘들잖수. 우리네 인생, 다 땀 흘려 돈 버는 건 매한가진데. 돕고 살아야지.”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라이더들은 ‘매일 박카스 사주는 좋은 아저씨’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 최민수는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내가 사실, 사람을 하나 찾고 있거든. 한 서너 달 전에, 저기 저 17층에서 일했던 젊은 양반들인데… 아주 비싼 도시락만 시켜 먹었다고 하더라고. 혹시 기억나는 거 없어?”

한 젊은 라이더가 박카스를 마시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 그 ‘호갱님’들! 기억나죠! 맨날 3만 원짜리 스테이크 도시락만 시키던. 우리 사이에서도 유명했어요. 근데 그 사람들, 좀 이상했어요.” “이상하다니?”

“주문할 때마다, 꼭 ‘결제는 법인 카드로, 단, 1층 로비에 두고 가세요. 절대 직접 전달하지 말 것’이라고 요청했거든요. 얼굴 한번 본 적 없어요. 그리고 그 법인 카드, 일반 카드가 아니라, 충전해서 쓰는 선불카드였어요. 회사 이름도 안 찍혀 있는 거.”

최민수의 귀가 번쩍 뜨였다. ‘선불 법인 카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전형적인 유령 회사의 수법이었다. “혹시… 그 카드, 어디서 발급하는 건지 알아?”

“에이, 저희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근데, 그 카드로 편의점에서도 뭘 자주 사 먹는 것 같더라고요. 한번은 제가 배달 갔는데, 1층 편의점 앞에서 그 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랑 마주쳤거든요. 손에 그 카드랑, 담배 한 갑을 들고 있더라고요.”

담배. 최민수는 그 젊은 라이더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혹시… 무슨 담배였는지 기억나?”

“음… 워낙 순식간이라. 아, 근데 좀 특이했어요. 담뱃갑이 파란색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못 보던 거였어요. 한자가 좀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최민수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곧장 사무실로 돌아와, 이동진과 함께 전 세계의 담배 종류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파란색 담뱃갑, 한자.’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하나의 담배를 찾아냈다.

‘중화(中华)’. 중국의 최고급 담배 브랜드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푸른색 패키지는 주로 홍콩이나 마카오의 면세점에서 한정판으로 판매되는 고가 라인이었다.

박재혁이 찾아낸 ‘홍콩’이라는 단서와, 최민수가 찾아낸 ‘홍콩 담배’라는 단서가, 소름 끼치게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사무실의 화이트보드는, 이제 새로운 정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동진은 모든 정보들을 시간대별로, 종류별로 완벽하게 정리했다. 그는 마치 거대한 직소 퍼즐을 맞추는 사람처럼, 친구들이 가져온 조각들을 제자리에 맞춰나가고 있었다.

“이상해….” 모든 정보를 정리하던 이동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왜 그래, 동진아?” 한기성이 물었다.

“이거 봐봐. ‘Leo_Blueocean_88’이 활동했던 시간대야. 주로 한국 시간으로 새벽 2시에서 5시 사이에 집중되어 있어. 전형적인 유럽이나 미주 시간대지. 그런데, 최민수가 알아온 도시락 배달 시간은, 전부 한국 시간으로 점심시간인 12시에서 1시 사이야. 만약 이놈들이 정말 외국에 있다면, 이 시간에 도시락을 시킬 이유가 없어. 시차가 전혀 안 맞아.”

이동진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는 가장 단순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모순을 찾아낸 것이다. “이놈, 혹은 이놈들 중 일부는… 분명히 한국에 있어. 우리와 똑같은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한기성은 이동진의 분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 모든 단서를 AI에게 마지막으로 입력했다.

‘용의자 특성 종합 분석 시작. 거점: 홍콩. 사용 기기: 아이폰. 통신사: HKT. 사용 화폐: 가상화폐(믹싱 서비스 활용). 식사: 강남 ‘셰프의 도시락’. 기호품: 중국 ‘중화’ 담배. 활동 시간: 한국 시간 기준 불규칙. 결론: 용의자는 최소 2인 이상의 그룹이며, 홍콩과 한국에 거점을 둔 ‘점조직’일 확률이 매우 높음.’

AI의 최종 프로파일링이 완료되었다. 유령의 그림자가, 이제 조금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한기성은 이 모든 정보를, 오하윤에게 비밀리에 전송했다. 그리고는 딱 한 문장을 덧붙였다.

[이 모든 특성을 가진 사람. 찾아낼 수 있을까요?]

며칠 후, 오하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흥분되어 있었다. “선배님… 찾은 것 같아요. 아니, 찾았어요. 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단 한 사람을.”

“……누구요?”

“3년 전, 홍콩 폴리테크닉 대학에서 열렸던 ‘아시아 블록체인 컨퍼런스’ 발표자 명단에서요. 당시 ‘차세대 익명성 강화 기술’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던 한국인 유학생이 한 명 있었어요. 이름은… 강이준. 스탠퍼드 컴퓨터공학 석사. 그리고… 그의 당시 사진 속에서,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기종은 아이폰이었고, 테이블 위에는… 파란색 ‘중화’ 담배가 놓여 있었어요.”

심장이 멎는 듯했다. 한기성은 떨리는 손으로, 오하윤이 보내온 사진 파일을 열었다.

사진 속에는, 3년 전의, 앳되고 자신감 넘치는 한 젊은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그들이 투자 제안서에서 보았던, ‘알파 프론티어 캐피탈’의 대표, 레오 강의 얼굴과 정확히 일치했다.

유령의 그림자는, 마침내 완전한 실체가 되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화이트보드 위에, ‘존 킴’과 ‘Leo_Blueocean_88’이라는 이름 위로, 한기성은 떨리는 손으로 새로운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강 이 준]

그는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최민수의 얼굴에는 분노를 넘어선 사냥개의 집요한 흥분이 감돌고 있었다. 박재혁의 얼굴에는 죄책감 대신, 자신의 전문성으로 반격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전율이 흐르고 있었다. 이동진은 말없이, 친구들에게 따뜻한 커피를 새로 타주고 있었다.

한기성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여전히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손이 렌치를 잡을 수 없다면, 이 AI라는 새로운 손으로, 유령의 목을 조이면 되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3단계 작전을 시작한다.” 한기성의 목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우리의 목표는, 이 ‘강이준’이라는 놈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제5화] 미끼를 던지다

화이트보드 중앙에 쓰인 ‘강이준’이라는 세 글자는, 더 이상 희미한 유령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네 명의 중년 남자가 반드시 잡아야 할, 피와 살을 가진 명확한 사냥감이 되었다. 하지만 사냥감은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요새, 즉 ‘익명성’이라는 디지털 성벽 뒤에 굳게 숨어 있었다.

‘인생 2막 본부’의 사무실은, 이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비상 대책 본부이자, 첨단 기술과 아날로그 경험이 교차하는 독특한 전쟁 상황실이 되어 있었다.

박재혁은 더 이상 값비싼 슈트를 입지 않았다. 그는 며칠째 같은 셔츠 차림으로, 노트북과 씨름하며 홍콩의 금융 법규와 가상화폐 자금 세탁 방지법(AML)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의 책상에는 법률 서적과 함께, 에너지 드링크 캔이 산처럼 쌓여갔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한낱 사기꾼에게 농락당했다는 치욕을,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되갚아줄 생각이었다.

최민수는 더 이상 치킨 기름 냄새 대신, 사람 냄새를 풍겼다. 그는 강남의 빌딩 숲을 누비고, 퇴직 경찰 동료들을 만나고, 심지어 흥신소와 연결된 뒷골목 정보원들과도 접촉하며 ‘강이준’의 한국 내 행적을 쫓았다. 그의 낡은 수첩에는, 이제 배달 맛집이 아닌, 의심스러운 인물들의 이름과 차량 번호, 그리고 그들의 사소한 습관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동진은 이 모든 정보의 조용한 지배자였다. 그는 친구들이 물어온 날것의 정보들을, 시간대별, 장소별, 인물별로 분류하고 연결하며, 화이트보드 위의 거대한 ‘관계 지도’를 매일같이 업데이트했다. 그의 침묵은 더 이상 무기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조각들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통찰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휘하는 한기성. 그는 자신의 떨리는 오른손을 애써 감추며, 차가운 이성으로 상황을 통제했다. 그의 파트너, MyAISmarteasy는 24시간 내내, ‘강이준’과 관련된 모든 디지털 흔적을 추적하고, 친구들이 가져온 아날로그 정보와 결합하여, 유의미한 패턴을 찾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결정적인 한 방은 나오지 않았다. 강이준은 귀신같았다. 그는 한국과 홍콩에 여러 개의 은신처를 두고, 철저히 점조직으로 움직였다. 대포폰과 차명 계좌는 기본이었고, 모든 연락은 암호화된 메신저로만 이루어졌다. 그들은 유령의 그림자 주변을 맴돌 뿐, 그 심장부로 들어가는 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회의실의 공기는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최민수가 먼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건 뭐, 숨바꼭질도 아니고. 놈은 우리를 훤히 보고 있는데, 우리는 눈 감고 술래잡기하는 꼴이잖아. 이러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어.”

박재혁이 지친 눈으로 말했다. “법적으로도 쉽지 않아. 홍콩 경찰에 협조를 요청해 봤지만, 저쪽은 우리 같은 민간 기업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아. 피해 사실을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가 더 필요해. 그런데 그 증거를 잡을 수가 없으니, 완전한 교착 상태야.”

모두의 시선이 한기성에게로 향했다. 한기성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그려진, 복잡하게 얽힌 관계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AI가 분석한 수만 건의 데이터와, 그의 30년 경험이 충돌하며 새로운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녀석이 숨어있다면, 우리가 밖으로 끌어내면 돼.”

친구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밖으로 끌어내다니? 어떻게?”

“우리가 당했던 방식, 그대로 돌려주는 거야.” 한기성의 눈이, 사냥감을 노리는 늙은 호랑이처럼 번뜩였다. “놈의 가장 큰 무기는, 시니어 세대의 ‘불안함’과 ‘무지함’이었어. 그리고 가장 큰 욕망은, ‘쉽고 안전하게 큰 돈을 벌고 싶다’는 것이지. 그 욕망을, 우리가 역이용하는 거야.”

그는 화이트보드에 새로운 작전명을 적었다. [3단계 작전: 미끼를 던지다 (Operation: Honey Pot)]

“박 사장. 자네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가짜 ‘시니어 AI 투자 펀드’를 하나 만드는 거야. 강이준의 것보다 훨씬 더 그럴듯하고, 훨씬 더 높은 수익률을 약속하는, 아주 달콤한 미끼를.”

박재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기성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우리가 사기꾼이 되자는 말이야?”

“아니. 사기꾼을 잡는 ‘사냥꾼’이 되자는 말이지.” 한기성은 자신의 노트북을 켜고, AI와 함께 밤새워 만든 기획안을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골든 에이지 AI 파트너스’라는 이름의, 아주 그럴듯한 가상 투자 회사의 홈페이지 시안이 떠 있었다. 디자인은 박재혁의 취향에 맞춰 최고급으로 꾸며졌고, 수익률 그래프는 현실적이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MyAISmarteasy를 이용해서, 이 홈페이지를 다크웹과, 강이준이 주로 활동하는 가상화폐 커뮤니티에 집중적으로 노출시킬 거야. 그리고 우리는 실제 투자자를 모집하는 게 아니야. 오직 단 한 명, 강이준이라는 물고기만 낚기 위한 가짜 낚싯대를 던지는 거지.”

그의 계획은 대담하고 위험했다. “강이준 같은 놈들은, 자신의 영역에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아. 특히,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기꾼(?)이 나타나면, 반드시 그 실체를 확인하려 들지. 자신의 먹잇감을 빼앗기기 싫어서든, 혹은 새로운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든. 놈은 반드시 우리에게 접촉해 올 거야.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최민수가 물었다. “접촉해 오면? 그 다음은 뭔데?”

“놈이 우리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순간, 우리는 놈의 IP 주소와 접속 기기 정보를 추적한다. 물론 놈은 VPN을 쓰겠지만, AI가 그 여러 겹의 가상 IP를 역추적해서, 실제 접속 위치의 범위를 좁혀 나갈 거야. 그리고, 만약 놈이 우리에게 이메일이나 메신저로 접촉해 온다면… 그게 바로 놈의 목에 방울을 다는 순간이 되는 거지.”

이것은, 최첨단 디지털 기술과,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아날로그적 지혜가 결합된, 완벽한 함정이었다. 박재혁은 한기성의 대담한 계획에 전율하며, 자신의 모든 금융 지식을 동원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가짜’ 투자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최민수와 이동진은, 가짜 회사의 그럴듯한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들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교묘하게 섞어냈다.

며칠 후, ‘골든 에이지 AI 파트너스’라는 이름의 유령 회사는, 어둠의 인터넷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흘렀다. 하루, 이틀, 일주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사무실의 공기는 다시 초조함으로 가득 찼다. “젠장, 놈이 우리 떡밥을 물지 않는 건가?” 최민수가 담배를 태우며 중얼거렸다.

박재혁도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너무 티가 났나? 아니면, 놈은 이미 우리보다 더 큰 건을 찾아 떠난 걸지도 몰라.”

한기성은 말없이, AI가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접속 로그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수많은 익명의 IP들이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바로 그때였다. [경고. 비정상적인 접근 패턴 감지.] AI의 경고 메시지가 화면에 번쩍였다.

[홍콩에 위치한 다중 프록시 서버를 통해, 특정 방문자가 홈페이지의 소스 코드와 보안 구조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반 투자자의 행동 패턴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용의자 ‘강이준’일 확률 72%.]

네 친구가 동시에 화면 앞으로 모여들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왔다.” 한기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놈이, 우리 덫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골든 에이지 AI 파트너스’의 공식 이메일 계정으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Daniel Park’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름이었다.

[件名: 파트너십 제안에 관하여] [안녕하십니까, 골든 에이지 AI 파트너스 대표님. 귀사의 혁신적인 시니어 투자 모델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홍콩에서 유사한 핀테크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교포 사업가입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귀사와 저희 회사가 함께 아시아 시니어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싶습니다. 차 한잔 함께 할 기회를 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메일의 내용은 정중하고 세련되었다. 하지만 한기성과 친구들은, 그 가면 뒤에 숨어있는 강이준의 탐욕스러운 눈빛을 볼 수 있었다.

박재혁이 흥분하며 소리쳤다. “걸려들었어! 이 자식, 우리를 떠보려는 거야. 혹은, 정말로 우리를 이용해서 더 큰 사기를 치려는 속셈일 수도 있어!”

한기성은 즉시 AI에게 명령했다. “이 메일의 발신 서버와 헤더 정보를 분석해. 모든 디지털 흔적을 찾아내.”

[분석 중… 완료.] [메일은 암호화된 보안 메일 서비스를 통해 발송되어 발신지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메일 본문에 첨부된 명함 이미지 파일에서, 미세한 데이터를 발견했습니다.]

AI는 첨부된 명함 이미지를 확대했다. [명함 이미지 파일의 EXIF 데이터 분석 결과, 이 이미지를 마지막으로 편집한 컴퓨터의 운영체제는 ‘macOS Ventura’, 사용된 프로그램은 ‘Adobe Photoshop 23.0’이며, 컴퓨터의 시스템 시간은 ‘한국 표준시(KST)’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한국?” 이동진이 놀라 되물었다.

“그래. 이 메일을 보낸 놈은, 지금 이 순간, 우리와 같은 하늘 아래, 대한민국에 있어.” 한기성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그는 ‘Daniel Park’에게 보낼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Daniel Park 대표님께.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역시 대표님과의 파트너십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다음 주 중으로, 저희 쪽에서 대표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뵙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편하신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시면, 저희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미끼를 물었다. 이제, 낚싯줄을 당겨, 놈을 물 밖으로 끌어낼 차례였다. 사냥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제6화] 가장 약한 고리

‘다니엘 박’이라는 가짜 이름 뒤에 숨은 강이준에게 답장을 보낸 후, ‘인생 2막 본부’의 사무실은 폭풍전야와 같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네 명의 친구들은 이제 사냥꾼이 되어, 먹잇감이 덫으로 걸어 들어오기만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마침내, 기다리던 답장이 도착했다. 답장은 예상대로 교활했다.

[한 대표님께. 바쁘신 와중에 직접 찾아주시겠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추진하는 프로젝트 때문에 외부 미팅이 조금 어렵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측의 실무 책임자를 대신 보내 대표님의 말씀을 먼저 듣게 해도 괜찮을까요? 저의 가장 신임하는 친구이니,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을 겁니다.]

박재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역시, 뱀 같은 놈이야. 절대 자기 모습은 드러내지 않겠다는 거지. 대리인을 보내서 우리의 실체를 확인하고,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나타나겠다는 속셈이야.”

최민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그 대리인 놈이라도 잡아서 족치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 한기성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그 대리인은 분명, 강이준의 ‘꼬리’일 거야. 위험을 감지하면, 언제든 자르고 도망갈 수 있는. 우리는 그 꼬리를 잡는 게 목표가 아니야. 그 꼬리를 이용해서, ‘몸통’의 위치를 알아내야 해.”

그의 시선이 화이트보드에 적힌 정보들을 훑었다. ‘셰프의 도시락’, ‘선불 법인 카드’, ‘홍콩 담배’. 이 모든 단서들은, 강이준이라는 ‘머리’가 아닌, 한국에서 그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누군가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민수야. 네 역할이 다시 중요해졌어.” 한기성이 최민수를 바라보았다.

“그 ‘셰프의 도시락’을 다시 파고들어. 하지만 이번엔 배달 기록이 아니야. 그 도시락 업체에 식자재를 납품하는 곳, 도시락 용기를 납품하는 곳, 심지어 그 가게의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업체까지. 그 주변을 맴도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 강이준의 그 대리인이, 즉 ‘가장 약한 고리’가, 반드시 그 어딘가에 또 다른 흔적을 남겼을 거야.”

이것은 AI가 할 수 없는,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최민수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슴속에, 다시 사냥개의 본능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최민수의 두 번째 탐문은 이전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집요했다. 그는 더 이상 어설픈 식당 주인을 연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성실하지만 조금은 어수룩한 ‘식자재 납품업체 영업사원’이 되었다.

그는 매일 아침, ‘셰프의 도시락’ 주방 뒷문으로 찾아가, 주방 아주머니들에게 박카스를 돌리고, 무거운 식자재 상자를 나르는 것을 도왔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주방 식구들도, 매일같이 찾아와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그의 성실함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했다. “아이고, 이모님. 여기는 도시락 용기도 비싼 거 쓰시네. 이런 건 어디서 납품받으세요?” “저희는 포장에도 신경을 많이 써서요. ‘그린패키지’라는 데서 친환경 용기만 받아서 써요.”

“이야, 역시. 근데 이모님, 저번에 그 17층 ‘알파’ 회사 같은 VVIP 손님들은, 결제 같은 거 어떻게 하셨어요? 저희도 그런 큰 거래처 하나 뚫고 싶은데, 노하우 좀….”

주방 아주머니는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쉿. 그 회사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우리 사장님도 그 회사 때문에 경찰 조사받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사람들, 결제는 늘 선불카드로 하고, 세금계산서도 필요 없다고 했어요. 대신, 배달할 때마다 도시락 말고, 아주 비싼 와인이나 위스키를 한두 병씩 같이 주문해서 따로 포장해달라고 했죠. 그것도 전부 그 법인 카드로 긁고. 좀 이상하긴 했지.”

와인과 위스키. 최민수는 그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상납하기 위한 ‘선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곧장 ‘그린패키지’라는 포장 업체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그는 똑같은 방식으로, 영업사원을 연기하며 정보를 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포장 업체의 한 젊은 직원이, 최민수가 건넨 담배를 피우며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아, 그 ‘셰프의 도시락’ 건이요? 기억나죠. 좀 특이한 주문이 많았어요. 한번은, 도시락 용기 말고, 아주 작은 선물 상자 100개를 주문한 적이 있었어요. 현금 카드를 담는 용도라고 하던데….”

“현금 카드요?” “네. 백화점 상품권 카드 같은 거요. 그걸 예쁘게 포장해서, 퀵서비스로 어디론가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주소가 아마… 강남의 한 오피스텔이었을 거예요. 보안이 엄청 철저한 곳이라, 퀵 기사님이 로비에서 사람 불러서 직접 전달했다고 들었어요.”

최민수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선불 법인 카드, 고가의 술, 그리고 현금 카드. 이것은 자금 세탁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강이준은 선불 법인 카드로 합법적인 ‘물품’을 구매한 것처럼 위장하고, 실제로는 현금화하기 쉬운 상품권이나 고가의 주류로 바꿔, 자신의 한국 내 조직원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그는 곧장 사무실로 달려가,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박재혁이 무릎을 탁 쳤다. “미친놈… 법인 카드의 사용 한도와 세무 조사의 허점을 완벽하게 이용한 거야. 저렇게 하면 자금의 출처를 숨기면서, 안전하게 현금을 전달할 수 있어. 정말 교활한 놈이야.”

한기성은 이동진에게 말했다. “동진아, 지금 당장 ‘셰프의 도시락’과 ‘그린패키지’의 지난 6개월간의 모든 카드 결제 내역을 확보해야 해. 그리고 퀵서비스 업체도. 민수야, 네가 다시 한번 가야겠다. 이번엔 그냥 부탁이 아니야. 우리가 그동안 모은 정보들을 미끼로, 그들을 설득해야 해. 우리가 찾는 놈이,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전국적인 사기 사건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려줘. 장사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우리가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약속하고.”

최민수와 이동진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끈질긴 설득과, ‘인생 2막 본부’가 가진 사회적 신뢰 덕분에, 마침내 그들은 결정적인 데이터, 즉 ‘선불 법인 카드 결제 기록’과 ‘퀵서비스 배송지 주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사무실의 화이트보드 위에는, 수십 개의 주소와 결제 시간, 배송 물품 내역이 빼곡하게 적히기 시작했다. 모든 정보는 암호와도 같았다.

한기성은 이 모든 데이터를 MyAISmarteasy에게 입력했다. “이 불규칙해 보이는 데이터들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 놈들의 아지트로 의심되는, 가장 빈번하고, 가장 중요한 배송지를 특정해 줘.”

AI가 수십만 건의 데이터를 교차 분석하고, 공간 정보를 시각화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서울 강남 지역의 지도가 떠오르고, 그 위로 수십 개의 점들이 찍혔다.

[데이터 분석 결과, 대부분의 배송은 불규칙한 오피스텔이나 상가로 분산되어 있습니다. 이는 추적을 피하기 위한 위장 주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단 한 곳, 아주 예외적인 패턴을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AI가 지도 위의 한 지점을, 붉은색 원으로 확대했다. 그곳은 강남의 고급 주상복합 오피스텔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그곳은 강남역 근처의, 아주 낡고 허름한 5층짜리 상가 건물이었다.

[이 건물 4층의 한 사무실로, 지난 6개월간 총 28차례의 퀵서비스 배송이 이루어졌습니다. 배송 물품은 주로 ‘서류’로 위장되었지만, 그 시간대는 모두 ‘셰프의 도시락’에서 고가의 주류나 상품권 카드가 결제된 직후입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화면이 바뀌며, 위성 사진과 로드뷰 화면이 나타났다. [이 건물의 1층에는, 24시간 운영하는 ‘사설 환전소’가 위치해 있습니다.]

사설 환전소. 가상화폐나 상품권을, 신원 확인 없이 즉시 현금으로 바꿔주는, 불법 자금 세탁의 마지막 창구였다.

“……찾았다.” 한기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곳이, 유령의 심장이야.”

강이준의 한국 내 자금 세탁을 총괄하는, ‘가장 약한 고리’의 진짜 아지트. 그들은 마침내, 보이지 않던 적의 실체를, 물리적인 공간으로 특정해 낸 것이다.


그날 밤. 네 명의 친구들은 낡은 승합차 안에서, 문제의 상가 건물을 지켜보며 잠복에 들어갔다. 이제는 그 ‘가장 약한 고리’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밤이 깊어지자, 건물 4층의 불이 꺼졌다. 잠시 후, 건물의 낡은 철문이 열리고, 한 젊은 남자가 주위를 살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후드티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파란색 담뱃갑. ‘중화’.

최민수가 흥분하며 속삭였다. “……맞아. 저놈이야.”

남자는 건물을 나와, 익숙한 듯 골목길로 사라졌다. 네 친구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마침내, 유령을 잡기 위한 진짜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더 이상 렌치나 드라이버가 들려 있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는, 친구의 인생을 되찾고,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보이지 않는 칼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칼날은, 이제 막 적의 목덜미를 향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제7화] 어느 노인의 진심

싸늘한 밤공기가 강남의 뒷골목을 감쌌다. 네 명의 중년 남자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후드티를 눌러쓴 젊은 남자의 뒤를 좇았다. 그들의 심장은 젊은 시절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냥의 긴장감으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젊은 남자는 익숙하게 골목을 누비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는 훈련이라도 받은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자신을 미행하는 이들이, 어설픈 아마추어가 아니라, 평생을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쫓아온 베테랑 ‘사냥꾼’들이라는 사실을.

최민수는 과거 퇴직 경찰 동료들에게서 배운 미행술을 본능적으로 떠올리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 박재혁은 스마트폰 지도 앱으로 남자의 예상 이동 경로를 파악하며, 다른 친구들에게 다음 매복 지점을 알렸다. 그리고 이동진은, 그 모든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며,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팀워크는 마치 수십 년간 함께 작전을 수행해 온 베테랑 팀처럼 완벽했다.

젊은 남자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서울 외곽의 한 평범한 빌라촌이었다. 그는 낡은 빌라 3층의 한 집으로,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네 친구는 빌라 건너편의 어두운 놀이터에 자리를 잡고, 그 집의 창문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3층의 창문에 불이 켜지고, 창문 너머로 남자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쳤다.

박재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좋아. 아지트를 확인했어. 이제 어떻게 할까? 경찰에 바로 신고할까?”

“아니.” 한기성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놈을 경찰에 넘겨봤자, 놈은 기껏해야 자금 세탁 방조 혐의로 가벼운 처벌만 받고 끝날 거야. 강이준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 안 하겠지. 저놈은 꼬리에 불과해. 우리는 저 꼬리를 이용해서, 몸통인 강이준을 낚아야 해.”

최민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직접 들어가서 족쳐서라도 불게 만들어야지.”

“그것도 아니야.” 한기성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폭력이나 협박은, 최악의 방법이야. 저놈을 겁주면, 놈은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숨어버릴 거야. 우리는 저놈의 ‘마음’을 열어야 해.”

“마음?” 친구들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기성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켰다. 그는 밤새, 오하윤의 도움을 받아 ‘강이준’과 ‘가장 약한 고리’에 대한 모든 것을 프로파일링했다. “MyAISmarteasy가 분석한 결과야. 저 친구의 이름은 ‘최현우’. 나이는 스물여섯. 특이사항은 없어.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고,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지만 중퇴했어. 그리고… 3년 전부터 신용불량자 상태야. 학자금 대출과 생활고 때문이었지. 강이준은, 바로 그 절망의 틈을 파고든 거야.”

그는 화면을 넘겼다. “AI가 최현우의 SNS 비공개 계정까지 접근해서 찾아낸 사진이야.” 화면에는, 최현우가 병색이 완연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의 그는, 지금의 어두운 모습과는 다른,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니가 희귀병으로 오랫동안 투병 중이셨고, 엄청난 병원비 때문에 빚더미에 앉게 된 거야. 강이준은 그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거지. ‘어머니를 살리고 싶으면, 너의 양심을 팔아라.’ 저 친구는 범죄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픈 어머니를 살리려 했던, 길을 잃은 아들이기도 해.”

사무실의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였다.

한기성은 마지막으로, 이동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일은, 동진이 네가 맡아줘야겠다.”

“……나?” 이동진은 당황했다. 평생을 남 앞에 나서기보다, 묵묵히 뒤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왔던 그였다.

“그래, 너여야만 해.” 한기성은 이동진의 어깨를 잡았다. “재혁이는 너무 날카롭고, 민수는 너무 뜨거워. 나는… 나는 이 손 때문에, 녀석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어. 하지만 너는 달라. 너는 우리 중에, 가장 깊은 절망의 바닥까지 떨어져 봤던 사람이야. 돈 때문에 자존심을 버려야 했던 그 아픔,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느꼈던 그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잖아. 네 진심만이, 저 친구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어.”


다음 날 아침. 이동진은 낡은 점퍼 차림으로, 최현우의 빌라 앞에서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의 손에는, 아침 일찍 아내가 싸준 따뜻한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잠시 후, 최현우가 피곤한 얼굴로 빌라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앞에, 낯선 노인이 서 있었다. 최현우의 눈에 즉시 경계심이 어렸다.

“누구세요?” “놀라지 말게, 젊은이. 나쁜 사람 아니야.” 이동진은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보온병을 내밀었다. “날이 쌀쌀한데, 따뜻한 국물이라도 한잔하고 가게.”

최현우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뿌리치고 가려 했다. 바로 그때, 이동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님… 병환은 좀 어떠신가?”

최현우의 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눈동자가 공포로 세차게 흔들렸다. “……당신, 뭐야. 내 뒤를 캔 거야?”

“그런 게 아니네. 그냥… 자네 얼굴을 보니, 옛날 내 모습이 생각나서. 나도 자네처럼, 돈 때문에… 가족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해봤던 사람이라서.”

이동진의 목소리에는, 어떤 꾸밈이나 위협도 없었다. 그저, 같은 길을 먼저 걸어온 인생 선배의 깊은 연민과 슬픔만이 담겨 있었다. 최현우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결국 무너진 듯, 빌라 앞 작은 공원 벤치에 주저앉았다.

이동진은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보온병 뚜껑에 따뜻한 배춧국을 따라 건넸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이동진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빚더미에 앉아, 가족들 볼 면목이 없어 죽으려고까지 했던 이야기.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며, 술 취한 젊은이에게 멱살을 잡히고도, 자식들 학비 때문에 참아야만 했던 이야기. 돈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해야 했던 그 비참했던 날들에 대해.

“……나도 그때는, 세상이 원망스럽고, 내 자신이 증오스러웠지. 하지만 말이야, 젊은이. 아무리 힘들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더라고. 그 선을 한번 넘으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돼. 나 자신을 영원히 용서할 수 없게 되거든.”

그는 따뜻한 국물을 마시고 있는 최현우를 바라보았다. “자네 눈을 보니 알겠어. 자네, 매일 밤 잠 못 자지? 어머니 얼굴 볼 때마다, 죄책감에 가슴이 무너지지? 그 돈, 손에 쥐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지? 그게 바로, 자네 마음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증거야.”

최현우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굳게 닫혔던 마음의 댐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다 알아봤네. 자네가 왜 이 일에 발을 들였는지.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건 자네 어머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닐 걸세. 자네가 범죄자가 되어 평생을 숨어 사는 걸, 과연 기뻐하실까?”

이동진은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곳에는, ‘인생 2막 본부’가 그동안 도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그들이 보내온 감사 편지들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할 걸세. 우리는 자네가 모시는 그 ‘대표’처럼, 남의 눈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는 남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들이야.”

그는 수첩을 최현우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자네가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준다면, 우리가 자네를 도와주겠네. 자네 어머니 치료비 문제도, 우리가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네.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가 다시 떳떳한 아들로,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손을 잡아주겠네.”

최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어깨가 점점 더 심하게 떨려왔다. 마침내, 그의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스물여섯 청년의 서럽고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아침 공기를 적셨다.


그날 오후. 최현우는 ‘인생 2막 본부’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네 명의 ‘아버지’들 앞에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강이준의 진짜 정체. 홍콩과 한국을 오가는 그의 이동 경로. 그들이 사용하는 비밀 메신저와 암호 체계. 그리고… 그들의 다음 범행 계획까지.

“……다음 타겟은, 전국에 있는 ‘시니어 커뮤니티 센터’입니다. 어르신들 대상으로, ‘노후 복지 AI 펀드’라는 이름으로 접근해서, 정부 지원금과 개인 연금을 동시에 노리는 겁니다. 다음 주에, 강남의 한 대형 이벤트홀에서, 대규모 투자 설명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강이준… 그 사람도, 이번에는 직접 참석할 거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유령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이 열린 것이다.

최현우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고개를 숙였다. “……저는, 어떤 처벌이든 받겠습니다. 하지만… 부디, 제 어머니께는….”

한기성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말게. 우리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

그날 이후, 최현우는 경찰의 ‘내부 제보자’로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인생 2막 본부’는, 박재혁의 법률 자문과 최민수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그가 짊어지고 있던 불법 사채를 정리하고, 그의 어머니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 사람의 진심이, 또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구원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마지막 사냥을 준비해야 했다.

사무실의 화이트보드에는, 강남 이벤트홀의 도면과 함께, 새로운 작전명이 쓰여 있었다. [최종 작전: 함정 (Operation: Trap)]

한기성은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이제, 이 길고 길었던 싸움을 끝낼 시간이었다.


 

[제8화] 함정

강이준의 다음 범행 계획, 즉 ‘시니어 커뮤니티 센터 대상 투자 설명회’라는 결정적인 정보를 손에 넣은 순간, ‘인생 2막 본부’의 사무실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비장함과 치밀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것은 더 이상 그들만의 돈을 되찾기 위한 복수극이 아니었다. 정보에 굶주리고, 노후에 불안해하는 수많은 다른 아버지, 어머니들의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앗아 가려는 거대한 사회악과의 전면전이었다.

한기성은 지체 없이, 자신의 옛 친구이자 지금은 퇴직 후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베테랑 형사, 박철민에게 연락했다. 박철민은 한기성이 건넨, AI가 정리한 방대한 양의 증거 자료와 내부 제보자 최현우의 진술을 보고는 사안의 심각성을 즉시 깨달았다.

며칠 후, 경찰청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합동 작전 회의실. 한기성과 박재혁은 ‘민간 전문가’ 자격으로, 서울지방경찰청의 최고 엘리트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했다. 화면에는 강이준의 얼굴 사진과 함께, 그가 벌여온 사기 행각의 계보가 거대한 마인드맵처럼 펼쳐져 있었다.

“용의자 강이준은, 우리가 지금까지 상대해 온 그 어떤 금융 사기범보다 교활하고 치밀합니다.” 박철민 형사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는 절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며, 모든 자금은 추적이 거의 불가능한 가상화폐 믹싱 서비스를 통해 세탁합니다. 이번 투자 설명회는, 우리가 그의 실체를 확보하고, 그의 국내 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입니다.”

경찰의 작전 계획은 단순하고 확실했다. 작전명은 ‘트로이의 목마’. 투자 설명회 현장에, 평범한 노인으로 위장한 베테랑 형사들을 대거 투입한다. 그리고 강이준이 투자 계약을 시작하는 결정적인 순간, 현장을 급습하여 현행범으로 체포한다는 계획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던 한기성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팀장님. 제게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기름때 묻은 기술자의 손을 가진 이 낯선 민간 전문가에게로 쏠렸다.

“단순히 현장을 덮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강이준은 분명, 현장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법정에서 ‘나는 정상적인 투자 유치를 했을 뿐, 사기를 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며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갈 준비를 해뒀을 겁니다. 우리는, 그가 스스로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 설명회에 참석한 수백 명의 다른 어르신들, 그리고 언론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완벽한 가면을 우리 손으로 벗겨내야 합니다.”

박철민 형사가 물었다. 그의 눈에는 의심이 아닌, 진지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한 사장님?”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한기성의 폭탄선언에, 회의실 안은 술렁였다. 박재혁은 기겁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기성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제가 직접, 평범한 투자에 관심 있는 은퇴 노인으로 위장하여 투자 설명회에 참석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질의응답 시간을 이용해 그의 논리적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를 도발할 겁니다. 그는 자신의 완벽한 시나리오에 흠집이 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극도의 나르시시스트입니다. 제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된 도발에, 그는 분명 이성을 잃고 스스로 덫에 걸려들게 될 겁니다.”

그의 계획은 대담했지만, 동시에 무모했다. 그의 건강 상태를 아는 박재혁은 결사반대했다. “기성아, 안 돼! 네 몸 상태로 그런 극도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한기성은 친구의 어깨를 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괜찮아.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리고… 이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이 모든 것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내 손으로 끝을 맺고 싶어.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진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그 안에는, 자신의 병약함을 뛰어넘는, 친구와 동료들을 지키려는 한 남자의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결국, 그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투자 설명회 당일, 한기성은 다른 위장 형사들과 함께 현장에 잠입한다. 최민수와 이동진은 행사장 외부에서 지원 및 돌발 상황에 대비하며, 도주로를 차단한다. 그리고 박재혁은, 경찰 지휘 본부의 이동식 차량 안에서, 한기성의 ‘눈과 귀’가 되어, AI가 분석하는 실시간 정보를 그에게 전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한기성은 새벽 일찍 일어나, 아내 혜숙이 곤히 잠든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내에게 ‘조합의 중요한 워크숍이 있어 1박 2일로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한 터였다. 그는 아내의 이마에 조용히 입을 맞추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집을 나섰다.

작전 본부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자신의 떨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유독, 떨림이 심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꺼내, 물도 없이 삼켰다. 약효가 돌기까지는 30분. 그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의지로 이 떨림을 이겨내야 했다.

‘버텨야 한다. 오늘 하루만… 오늘 하루만 버티면 된다.’

경찰청 분장실. 한기성은 낡지만 깨끗하게 다려진 양복으로 갈아입고, 희끗희끗한 머리에는 약간의 왁스를 발라 평범한 은퇴 노인처럼 보이도록 분장했다. 그의 귀에는 살색의 초소형 무선 이어피스가 완벽하게 숨겨졌고, 그가 쓸 낡은 돋보기안경에는, 오하윤의 연구팀이 밤을 새워 개발한 최신 스마트 렌즈가 부착되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안경이었지만, 그 렌즈에는 박재혁이 보내는 모든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투사될 터였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친구들과 마주 섰다. 최민수는 그의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기성아, 절대 무리하지 마라.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빠져. 돈 몇 푼보다 네 목숨이 백배 천배는 더 중요해.” 이동진은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 어떤 말보다도 깊은 신뢰가 담긴 눈빛이었다. 박재혁은 그의 눈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네 눈이 되어주고, 네 두뇌가 되어주겠다. 걱정하지 마. 우리는 한 팀이야.”

한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투자 설명회가 열리는 강남의 대형 이벤트홀. 수백 명의 노인들이, ‘안정적인 노후’라는 달콤한 꿈을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한기성은 그 인파 속에 섞여, 천천히 행사장으로 들어섰다.

그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싸움터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제9화] 지휘자의 교향곡

투자 설명회 현장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화려한 조명과 웅장한 음악, 그리고 ‘황금빛 노후’를 약속하는 현란한 영상이 수백 명의 노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었다. 강이준, 즉 ‘레오 강’은 마치 세상을 구원하러 온 젊은 선지자처럼, 유창한 말솜씨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무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여러분! 더 이상 자식들에게 손 벌리는 비참한 노후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폐지를 주우며 추운 겨울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평생을 바쳐 이룩한 대한민국입니다. 이제는 그 결실을, 편안하고 풍요롭게 누리실 자격이 있습니다! 저희 ‘골든 에이지 AI 펀드’가,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황금빛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의 선동적인 연설과, 화면을 가득 채운 정교하게 조작된 수익률 그래프에, 노인들은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희망과 탐욕이 뒤섞여, 이성적인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한기성은 객석 뒤편의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앉아, 이 모든 광경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귀에 꽂힌 이어피스 너머로, 지휘 차량에 있는 박재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성아, 들리나? 현장 상황 깨끗해. 위장 팀원들 모두 제 위치에 배치 완료. 지금부터 놈의 발표 내용을, MyAISmarteasy가 실시간으로 팩트 체크해서 네 안경 렌즈 우측 상단에 띄워주겠다. 놈의 모든 거짓말을, 팩트로 박살 내버려.”]

강이준의 발표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드디어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궁금한 점이 있으신 어르신께서는 손을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하자, 행사장 곳곳에서 수십 개의 손이 경쟁적으로 올라갔다.

한기성은 그들과 경쟁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질문이 끝나고, 사회자가 행사를 마무리하려던 바로 그 순간, 아주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손을 들었다. 그의 침착한 태도는, 오히려 사회자와 강이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저는 평생을 공장에서 기계만 만지다 은퇴한, 세상 물정 모르는 늙은이입니다. 대표님의 말씀, 참 꿀처럼 달콤해서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만… 한 가지 정말 궁금한 게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그토록 자랑하시는 그 ‘AI 알고리즘’이라는 것, 대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저희 같은 늙은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딱 하나만, 쉽게 설명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질문은 지극히 평범하고 어수룩해 보였다. 강이준은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질문 공세 대신, 순진한 노인의 질문이 나오자 안심했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받아쳤다. “물론입니다, 아버님. 좋은 질문입니다. 저희 알고리즘은, 아주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한 펀드매니저 수천 명의 두뇌를 합쳐놓은 것과 같습니다. 24시간 잠도 자지 않고….”

그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강이준이 한마디의 거짓말을 내뱉을 때마다, 한기성의 스마트 렌즈에는 AI가 분석한 무자비한 팩트 체크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떠올랐다.

강이준: “저희 AI는 지난 5년간의 백테스팅 결과, 연평균 15%의 ‘무위험’ 수익률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보장했습니다!” 한기성: (안경 렌즈: [팩트 체크: 금융감독원 공시 자료 확인 결과, 지난 5년간 연 10% 이상 수익률을 꾸준히 기록한 ‘공모 펀드’는 존재하지 않음. ‘무위험’ 수익률은 국채 금리 수준인 2~3%를 넘을 수 없음. 15%는 명백한 허위 과장 광고.]) “대표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알기로 세상에 ‘무위험’이라는 투자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연 15%라는 수익률은, 투자의 신이라는 워렌 버핏 할아버지도 매년 달성하지는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저희가 모르는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 말씀,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앞에서 법적으로 책임지실 수 있는 발언입니까?”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강이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강이준: “허허, 좋은 지적이십니다. 저희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 세계 수천 개의 우량 자산에 완벽하게 분산 투자하여 리스크를 ‘제로(0)’로 만듭니다!” 한기성: (안경 렌즈: [팩트 체크: 그가 제시한 포트폴리오는 대부분 조세 피난처에 등록된, 실체가 불분명한 유령 회사와, 일반인은 투자할 수 없는 고위험 파생 상품으로 구성됨. 오히려 리스크를 극대화하는 ‘몰빵’ 투자 구조.]) “대표님께서 투자하신다는 그 ‘우량 자산’ 목록을 보니, 제가 처음 들어보는 버뮤다나 케이맨 제도 같은 곳에 있는 회사들이 많던데, 혹시 그 회사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하는 곳인지, 저희 같은 무지한 노인들을 위해 딱 세 군데만이라도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기성의 질문은, 평범한 노인의 어수룩한 질문처럼 들렸지만, 그 내용은 검사의 취조처럼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그의 등 뒤에서는, 박재혁과 AI가 완벽한 한 팀이 되어, 강이준의 모든 거짓말의 급소를 실시간으로 찔러대고 있었다.

점점 궁지에 몰린 강이준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의 완벽했던 가면 뒤로, 초조함과 분노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버님, 아까부터 자꾸 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이건 최첨단 금융 공학의 세계입니다! 아버님 같은 구시대적인 분이, 평생 공장에서 기름이나 만지던 분이 이해하실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요!”

그의 오만한 외침에, 객석의 분위기는 오히려 싸늘하게 식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한기성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어피스를 통해 들려오는 마지막 한마디를, 그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았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강이준 씨?”

순간, 강이준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버렸다. ‘레오 강’이라는 가짜 이름 뒤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진짜 이름.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믿었던 그 이름이, 낯선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그의 완벽했던 세계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당… 당신, 뭐야! 당신 정체가 뭐야!” 그가 이성을 잃고 소리치는 순간, 행사장 곳곳에 평범한 노인처럼 앉아 있던 위장 형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꼼짝 마! 서울지방경찰청이다! 강이준, 당신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및 불법 유사수신 행위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노인들의 울분과 고함, 그리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모든 것이 끝난 순간, 한기성은 극도의 긴장감이 풀리면서,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흐려지며, 그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그는 보았다. 친구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완수했다는 깊은 안도감을.

그것은, 한기성이라는 늙은 지휘자가, 그의 친구들과, AI라는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연주해 낸, 가장 완벽하고도 통쾌한 교향곡이었다.


[제10화] 승리의 대가

한기성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병원의 새하얀 천장과,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였다. 그의 곁에는, 밤새 뜬눈으로 그를 지킨 친구들과, 눈이 퉁퉁 붓도록 운 아내 혜숙이 있었다.

“……여보.” 그가 힘겹게 입을 열자, 혜숙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가슴을 쳤다. “……당신, 이 바보 같은 영감탱이야!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나한테, 우리한테 말 한마디 안 했어! 당신이 무슨 슈퍼맨이야! 혼자서 모든 짐을 다 짊어지려고 해!”

아내의 원망 섞인 울음 속에는, 깊은 사랑과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결국, 그의 비밀은 모두에게 알려졌다. 친구들은 의사로부터 그의 병에 대한 모든 것을 전해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떨리는 손을, 자신들의 거친 손으로 맞잡을 뿐이었다. 그가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싸움을 해왔는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박재혁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며칠 후, 퇴원한 한기성을 맞이한 것은, 세상의 뜨거운 찬사였다. ‘인생 2막 본부’는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언론은 그들을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수호자’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박철민 형사로부터 날아온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강이준과 국내 조직원들은 모두 체포했지만, 자금은 대부분 추적이 불가능한 해외의 다크월렛(Dark Wallet)으로 이미 빼돌려진 상태입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국제 공조 수사를 요청하겠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피해액 회수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셔야 합니다.”

그들은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진 셈이었다. 친구들과 조합원들이 잃어버린 수십억의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다시, 승리했지만 패배한 자들의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망연자실해 있던 그때, 한기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병을 앓기 전보다 더沙哑했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깨달음에서 오는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아니.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그는 자신의 병을 받아들인 후, 오히려 더 맑아진 눈으로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돈이지만, 우리가 얻은 것도 있어. 바로 ‘신뢰’와, 다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귀중한 ‘데이터’야.”

그는 오하윤과 함께 밤새워 만든 새로운 프로젝트 기획안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그 기획안의 제목은 이러했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AI 금융 안전망 플랫폼 – ‘현역 가디언(現役 Guardian)’]

“우리는 이번 싸움을 통해, 시니어들을 노리는 최신 금융 사기의 모든 패턴과 수법,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심리까지,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했어.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AI가 실시간으로 금융 사기를 감지하고, 경고하고, 예방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거야. 더 이상 우리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우리가 모두의 ‘방패’가 되어주는 거지.”

그의 제안에, 절망에 빠져 있던 친구들의 눈에 다시, 아주 희미한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돈을 잃었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사명’을 얻게 된 것이다.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고, 더 의미 있는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의 ‘현역’으로서의 삶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제11화 / 최종화]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현역(現役)

1년 후, 봄.
시간은 잿더미 위에서도 어김없이 꽃을 피워내는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경기도 외곽의 쇠락해가던 공단 지역. 한때는 버려진 공장들의 깨진 유리창이 흉터처럼 남아 있던 그곳에, 이제는 주변의 풍경을 환하게 밝히는 등대 같은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낡은 창고를 개조했지만, 그 외벽을 감싼 담쟁이덩굴과 옥상에 가꿔진 작은 정원은, 이곳이 더 이상 차가운 기계들의 공간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건물 정문 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현판에는 세련되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서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단법인 시니어 기술 협동조합 – 인생 2막 본부]**

과거 ‘인생 2막 기술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네 친구의 허름한 사무실은, 이제 대한민국 산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적 기업이자, 수많은 퇴직 기술자들의 새로운 희망의 메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작은 날갯짓은, 이제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태풍의 눈이 되어 있었다.

오늘도 조합의 가장 큰 강의실은, 하얀 머리카락과 깊은 주름, 그리고 스무 살 청년의 것보다 더 뜨거운 배움의 열정으로 가득 찬 50대, 60대, 심지어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친 70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평생을 만져온 렌치와 드라이버 대신, 어색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거친 손가락이 화면 위를 조심스럽게 누를 때마다, 그들이 평생을 살아온 아날로그 세계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디지털 세계가 경이롭게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이 모든 기적을 만들어낸 남자, 한기성이 서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기름때 묻은 작업복이 아닌, 깔끔한 셔츠 차림이었지만,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팔뚝에 깊게 팬 힘줄과 눈빛에 서린 장인의 깊이는 여전했다.

“자, 다들 주목해 주십시오. 오늘 강의의 주제는 ‘MyAISmarteasy, 내 파트너와 소통하는 법’입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기술적인 원리를 배웠다면, 오늘부터는 이 똑똑한 녀석과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울 겁니다.”

한기성은 이제 베테랑 강사처럼, 여유로운 유머를 섞어가며 강의를 이끌어 나갔다.
“많은 분들이 AI라고 하면, 어렵고 복잡한 컴퓨터 기술부터 떠올리십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외계어처럼 들렸죠. 하지만 제가 지난 2년간 이 똑똑한 파트너와 함께 일하며 깨달은 것은 딱 하나입니다. 이 녀석은… 사실 기계라기보다는, 아주 예의 바르고 아는 건 많지만,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 ‘외국인 신입사원’에 가깝다는 겁니다.”

강의실 여기저기서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과거 잘나가던 섬유 공장 사장이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밀려 모든 것을 잃었던 최영감님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역시 처음엔 스마트폰 전원 켜는 법도 몰라 쩔쩔맸었다.

“자, 그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이 외국인 신입사원에게 일을 제대로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야, 그거 좀 알아서 잘해봐’ 같은 우리 식의 두루뭉술한 언어가 아니라,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지시해야 합니다. ‘어떤 기계가, 어떻게 아프고, 언제부터 아팠는지’를, 마치 의사에게 설명하듯이 정확하게 알려줘야 합니다. 둘째, 그가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정확한 정보와 데이터’를 제공해야 합니다.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소리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공유해야 이 친구도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내놓은 수많은 결과물과 가설 속에서 진짜 ‘정답’을 찾아내는 것은, 결국 수십 년간 현장에서 땀 흘리고 기름 만져온 우리의 ‘경험’과 ‘지혜’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대형 스크린에 띄웠다.
“AI는 정답을 바로 알려주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을 수십, 수백 배로 증폭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확성기’이자, 우리의 낡은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주는 가장 정밀한 ‘현미경’입니다. 우리는 AI의 주인이 될 필요도, 노예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서로를 존중하고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면 되는 겁니다.”

그의 강의는 기술 강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동년배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응원이자, ‘나이 듦’이 결코 ‘뒤처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그들의 잃어버린 자부심을 되찾아주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강의가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끝나자, 최영감님이 다가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한 이사장님, 고맙소. 덕분에 나 같은 늙은이도 다시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오. 내 남은 인생을 다시 한번 걸어볼 용기가 생겼소.”

강의를 마친 한기성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의 사무실은 조합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작고 소박한 공간이었다. 화려한 이사장실 대신, 그는 언제든 현장으로 달려 나갈 수 있는 이곳을 고집했다. 그곳에는 그의 오랜 친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고운영책임자(COO)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진 박재혁은, 이제 월스트리트 저널 대신, 전국의 조합 지부 현황과 재무 상태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대시보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사업가적 기질을, 이제는 이윤이 아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쏟아붓고 있었다.
“기성아, 방금 대구 지부에서 연락 왔는데, 거기 섬유 공장 20년 된 염색기 문제, 우리 교육생 2기 출신 박영감 팀이 해결했다고 난리 났어. 그 공장 사장님이 감사의 의미로 조합에 발전기금 1억을 기부하겠다고 하네. 허허, 내가 이 나이에 돈 세는 재미에 다시 빠질 줄이야. 근데 예전처럼 공허하지가 않아. 이상하지? 수천억짜리 M&A를 성사시켰을 때보다, 저 1억이 더 무겁고 따뜻하게 느껴져.”

그의 얼굴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충만함이 가득했다.

현장 지원 총괄 본부장이 된 최민수는, 전국에서 올라온 감사 편지와 함께 배달된 특산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는 강원도에서 보낸 찰옥수수, 제주도에서 보낸 감귤, 전라도에서 보낸 갓김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거 봐라. 강원도 옥수수 농장에서 보낸 찰옥수수, 저번 주에 우리가 트랙터 고쳐준 보답이란다. 제주도 감귤 농장에서는 감귤 한 박스를 보냈어. 야, 이러다 우리 삼시세끼를 전국 팔도 특산물로 다 해결하겠다. 역시 영업은 비싼 술 사주면서 하는 게 아니라, 발로 뛰면서 인심을 얻어야 하는 거야. 사람 마음을 얻어야, 진짜 계약이 따라오는 거라고.”

그의 얼굴에는 망해가는 치킨집을 운영할 때의 불안함 대신, 사람들과의 진실된 관계 속에서 얻는 진정한 행복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 고객 만족 및 교육 지원 센터장이 된 이동진은, 새로 들어온 3기 교육생들의 서류를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정리하며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그늘진 얼굴의 경비원이 아니었다.
“오늘 오후에 신입 교육생 한 분이 찾아오셨는데, 얼마 전까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그만두셨다고 하더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이제 죽는 날만 기다려야 하나 싶어 좌절하고 계셨는데, 여기서 다시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돼서 정말 기쁘다고, 내 손을 잡고 눈물까지 글썽이시더라. 내가… 내가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지. 우리 조합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희망이, 마지막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가슴이 뛴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패배감이 없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일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있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그들은 돈이나 명예를 좇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 그 어떤 부자보다도 충만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

사무실 한쪽, 유리벽으로 분리된 기술 연구소에서는, 이 모든 기적의 숨은 공로자이자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인 오하윤이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DK정밀의 에이스였던 그녀는, KDX 사태 이후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인생 2막 본부’의 기술 연구소장으로 합류했다. 그녀의 결정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이곳이야말로 대한민국 제조업의 ‘미래’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음성 인식률을 더 높여야 해요. 특히 사투리를 쓰시거나, 발음이 어눌하신 분들도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딥러닝 모델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터페이스는 더 단순하게! 아이콘 크기는 키우고, 텍스트보다는 그림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고민해 봅시다. 우리의 목표는, 스마트폰을 난생 처음 써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돋보기 없이, 자식이나 손주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AI를 만드는 거예요. 기술이 사람을 소외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을 품어야죠.”

그녀는 이제 단순히 뛰어난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기술과 사람을 잇고,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혁신가였다. 그녀의 연구실에는, 전국의 유수 대학에서 그녀의 비전을 보고 모여든 젊고 총명한 인재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시니어 기술자들의 풍부한 현장 경험과 데이터에, 자신들의 최신 IT 기술을 결합하여,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밤낮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 안내 수리 매뉴얼’, ‘청각 장애인을 위한 진동 패턴 분석기’ 등, 그들의 기술은 언제나 사회의 가장 약한 곳을 향해 있었다.

바로 그때, 한기성의 사무실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박정훈. 박재혁의 아들이었다. 그는 이제 홍대의 작은 로봇 카페 사장이 아니었다. 그의 데이터 기반 카페 모델은 국내 최대 규모의 프랜차이즈 기업에 거액에 인수되었고, 그는 그 회사의 최연소 ‘미래 전략 본부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방식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했던 과거를 넘어, 아버지의 경험과 자신의 데이터를 결합하는 법을 배운 새로운 세대의 리더였다.

“한 이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와는 다른, 진심 어린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기성을 바라보았다.

“저희 회사에서, 전국 3천 개 매장의 노후화된 커피 머신과 키오스크를 전면 교체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 현장의 점주님들께서 새로운 기계에 적응하는 것을 굉장히 어려워하십니다. 대부분 저희 아버지 연배이시거든요.”

그는 자신이 준비해 온 사업 계획서를 내밀었다.
“그래서… 저희는 이 프로젝트를, ‘시니어 기술 협동조합’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새 기계를 무작정 도입하는 대신, 이사장님의 조합에서 저희 기존 기계들을 ‘업그레이드’하고, ‘유지보수’를 전담해 주십시오. 그리고 전국에 계신 조합원들께서, 저희 점주님들을 대상으로 1:1 맞춤 교육을 진행해 주시는 겁니다. 젊은 저희 직원들이 백 마디 설명하는 것보다, 비슷한 연배의 선배님들께서 ‘나도 해봤는데 별거 아니더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저희 프랜차이즈와 조합이 함께 성장하는 ‘상생 모델’이 될 겁니다.”

그것은, 또 다른 세대의 방식으로 건네는 존중과 협력의 제안이었다.
한기성은 박정훈의 계획서를 받아 들고, 그의 아버지 박재혁을 쳐다보았다. 박재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어깨를 툭 쳤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제 서로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최고의 사업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

그날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드는 조합의 옥상.
한기성과 세 명의 친구들은 난간에 기댄 채, 자신들이 일군 이 새로운 왕국과, 그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노을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물 아래 주차장에서는, ‘제1회 시니어-주니어 상생 기술 박람회’를 마친 사람들이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70대 기계 명장 할아버지가 3D 프린터에 푹 빠진 고등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무언가 조언하고 있었고, 젊은 대학생들은 농부 출신 조합원에게 드론으로 촬영한 농장 영상을 보여주며 함께 웃고 있었다.

낡은 경험과 새로운 기술이 만나, 세대와 세대가 서로의 스승이 되고 제자가 되는, 아름답고도 역동적인 풍경이었다.

최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참… 믿기지가 않는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나는 망해가는 치킨집에서 한숨만 쉬고 있었는데. 내 인생은 그걸로 끝인 줄 알았지.”
이동진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나는 차가운 아파트 단지를 절뚝거리며 돌고 있었지.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웃을 날이 없을 줄 알았어.”
박재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텅 빈 집에서, 돈으로도 채울 수 없는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고. 모든 걸 가졌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었지.”

세 친구의 시선이, 말없이 서 있는 한기성에게로 향했다.
한기성은 먼 곳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내 30년 기술이, 고작 낡은 돋보기안경 없이는 쓸모없어지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내 시간은 이제 멈췄다고, 그렇게 믿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손은 여전히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놈의 병까지 얻었을 땐… 정말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니었어. 우리의 시간은 끝난 게 아니었어. 다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연장이 필요했을 뿐이야. 망치를 쓰던 시대에, 전동 드릴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 우리 네 사람이 함께였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네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자신들의 지난 세월과, 기적처럼 찾아온 지금과,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시간을 말없이 느끼고 있었다.

옥상에서 내려온 한기성의 눈에, 늦게까지 연구실에 불을 밝히고 있는 오하윤과 젊은 연구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젊은 팀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창밖의 한기성을 발견하고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한기성 역시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대한민국이 마주한 거대한 현실이 스쳐 지나갔다.
일할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저출산의 위기.**
부양해야 할 사람은 점점 늘어나는 **고령화의 비극.**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등을 돌렸던 세대 갈등의 깊은 골.

과거의 그는, 이 거대한 문제들 앞에서 그저 스러져 갈 운명인, 힘없는 개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평생의 지혜를 나눈 친구들을 보았다. 그리고 저 창문 너머에서 미래의 기술을 탐구하는 젊은 후배들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손안에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연결해 주는 든든한 파트너, MyAISmarteasy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에 부딪힌 대한민국.**
이 거대한 파도 앞에서, 실버 세대의 깊은 경험과 MZ 세대의 빛나는 기술력이 손을 잡고 있었다. 서로 다른 세대가 AI라는 강력한 다리를 통해,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의 팀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한때는 불가능해 보였던 기적.
그들이 함께 만들어나갈 **‘내일의 대한민국’**이었다.

한기성은 더 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과, 그리고 저 젊은 후배들과 함께, AI라는 새로운 돛을 달고 이 거친 바다를 항해해 나갈 것이다.

그때, 그의 스마트폰이 다시 한번 경쾌한 알림음을 냈다.
MyAISmarteasy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그것은 그가 몇 달 전, 호기심 반, 사명감 반으로 AI에게 던져두었던, 가장 크고 막연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요청하신 ‘대한민국 고령화 및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세대 통합형 AI 기술 활용 모델’에 대한 최종 보고서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결론: ‘시니어 기술 협동조합’ 모델을, 기술 분야를 넘어, 농업, 어업, 전통문화, 그리고 육아 및 보육 분야까지 확장할 경우, 이는 단순한 일자리 창출을 넘어, 단절된 세대를 잇고, 공동체의 회복을 통해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솔루션이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새로운 과제를 제안하시겠습니까?]

한기성은 친구들과 오하윤에게 AI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모두의 눈이, 믿을 수 없는 희망과 가능성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대한민국을 넘어, 이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더 크고 위대한 청사진을 향하고 있었다.

박재혁이 가장 먼저 외쳤다.
“이거… 이거야말로 진짜 ‘사업’인데? 대한민국 전체를 컨설팅하는 거야!”
최민수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좋아! 내가 전국을 돌면서, 솜씨 좋은 할머니 셰프님들을 모아서, ‘시니어 공유 주방’을 만드는 거야! 맞벌이 부부들 밥 걱정을 덜어주는 거지!”
이동진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내 남은 힘을 쓰고 싶네. 할아버지의 지혜를, 우리 손주들에게 전해주는 거지.”

모두가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던 그 순간, 한기성은 AI의 화면에 떠 있는 [새로운 과제 제안]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표정은 이전과는 다른, 더 깊고 철학적인 고뇌에 빠져 있었다.

“왜 그래, 기성아? 뭘 망설여?”
박재혁이 물었다.

한기성은 친구들과, 자신의 곁에 선 젊은 파트너 오하윤을 번갈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아.”

그는 화면에 떠 있는 AI의 분석 보고서를 가리켰다.
“이 녀석은 ‘한국형 시니어 기술 협동조합 모델’의 성공 가능성을 분석했어. 아주 정확한 분석이지. 하지만 이 녀석이 분석하지 못한 게 있어. 바로, 이 모델의 ‘핵심’이 무엇인지야.”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가 성공한 이유가, 단순히 늙은 기술자의 경험과 AI의 데이터가 합쳐졌기 때문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가 성공한 진짜 이유는, 이동진이 최현우라는 젊은이의 마음을 움직였던 ‘진심’ 때문이었고, 최민수가 동네 상인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나눴던 ‘관계’ 때문이었으며, 박재혁 네가 모든 걸 잃고도 책임을 지려 했던 ‘자존심’ 때문이었어.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믿었던 ‘우정’ 때문이었지.”

그의 시선이 오하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하윤 씨 같은 젊은 세대가, 우리를 ‘낡은 세대’로 무시하는 대신, ‘존중’하고 손을 내밀어 주었기 때문이야. 이 모든 것들을 빼고, 단순히 기술과 경험만 남은 ‘모델’을 해외에 수출한다면… 그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건 그냥… 영혼 없는 기계일 뿐이야.”

그의 말에, 사무실 안에는 숙연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깨닫고 있었다. 자신들의 성공이, 결코 데이터로 설명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었음을.

바로 그때, 오하윤의 개인 태블릿에 새로운 메일 도착 알림이 떴다. 정부 부처의 공식 로고가 찍힌 메일이었다.
“……선배님.”
메일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고용노동부에서 온 공식 서신이에요. 저희 조합의 성공 모델을, ‘국가 표준 시니어 재취업 프로그램’으로 채택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 조합의 성공 철학과 운영 방식을 담은, 공식 ‘매뉴얼’을 제작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전국의 모든 퇴직자들이 이 매뉴얼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요.”

박재혁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거야! 국가가 우리의 가치를 인정한 거야! 이건 우리 조합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야!”

하지만 오하윤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지만 선배님… 그분들의 요청은, ‘한기성 이사장님의 철학을 정량화하고,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한 표준화된 프로세스를 구축’해달라는 거예요. 마치… 자동차 정비 매뉴얼처럼요.”

그 순간, 모두가 한기성이 던졌던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들의 ‘진심’과 ‘관계’, ‘자존심’과 ‘우정’을, 과연 매뉴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을 공식으로 만들고, 시스템으로 규격화하는 순간, 가장 중요했던 ‘영혼’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한기성은 친구들과 오하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는, 해외 시장 진출을 제안하는 AI의 메시지와, 국가 표준 매뉴얼을 만들어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차례로 내려다보았다.

하나는 ‘확장’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표준화’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모두,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지켜왔던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AI의 [새로운 과제 제안] 버튼을 껐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젊은 후배를 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의 진짜 마지막 과제는, 해외로 나가는 것도, 국가의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야.”
그의 눈빛은, 이제 한 시대의 철학자처럼 깊고 단단해져 있었다.

“우리가 후배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짜 유산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 그것은 기술이나 성공 모델이 아니야. 바로, ‘현역(現役)’이란 무엇인가. 나이 들어도 존엄을 잃지 않고, 세상에 기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가치’와 ‘정신’을 남겨주는 일이야.”

그의 시선이 화이트보드로 향했다.
그곳에는 1부의 제목이었던 ‘60세 현역, 내 파트너는 AI’와, 2부의 제목이었던 ‘현역의 조건’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1부에서는 ‘현역’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2부에서는 ‘현역’으로 남기 위한 조건을 싸워서 쟁취했어.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은, 바로 이것이다.”

그는 떨리는 오른손으로, 마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화이트보드의 가장 윗부분에, 그의 모든 깨달음을 담아, 다음 이야기의 제목이 될 세 번째 질문을 힘주어 써 내려갔다.

**[현역(現役)의 정의(定義)]**

그 글씨를 보는 순간, 모두가 숨을 삼켰다.
그들의 진짜 마지막 과제, 그들의 철학을 후대에 남기는 위대한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석양이 지고, 조합의 건물에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한기성과 그의 친구들은 옥상에서 내려와, 새로운 시대를 향해 다시 걸어 나갈 준비를 했다. 그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손주들의 재롱을 보고, 아내와 함께 TV를 보며 평범한 저녁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내일 아침이 되면, 그들은 다시 이곳에 모여,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설 것이다.

저 멀리,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네 명의 중년 남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세월이 내려앉아 하얗게 센 머리카락. 하지만 그 머리카락은 더 이상 쇠락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의 지혜와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그 어떤 젊음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왕관’이었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더 이상 위태롭거나 지쳐 있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당당히 선 노장들의 발걸음은, 그 어떤 청년의 발걸음보다도 힘차고 당당했다. 석양의 마지막 빛이 그들의 흰 머리카락을 비추자, 마치 후광처럼 눈부시게 흩날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현역(現役)이었다.

 

 

3권. <현역의 정의>

[제1화] 독이 든 성배

초여름의 햇살이 ‘사단법인 시니어 기술 협동조합 – 인생 2막 본부’의 통유리 외벽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낡고 버려졌던 이 창고 건물은, 이제 생기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잘 정돈된 마당에는 색색의 꽃들이 만개했고, 건물 내부에서는 최신 설비의 둔탁한 기계음과, 시니어 교육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전 교육 시간. 가장 큰 강의실은 하얀 머리카락과 깊은 주름이 훈장처럼 새겨진 50대, 60대, 심지어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친 70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평생을 만져온 렌치와 드라이버 대신, 이제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이 익숙해진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친 손가락이 화면 위를 조심스럽게 누를 때마다, 그들이 평생을 살아온 아날로그 세계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디지털 세계가 경이롭게 연결되고 있었다.

강의를 진행하는 것은 현장 지원 총괄 본부장 최민수였다. 그는 칠판에 적힌 ‘AI 기반 무인카페 시스템 진단법’이라는 딱딱한 제목 대신, 자신의 치킨 가게에서 겪었던 튀김기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한 무용담처럼 풀어내고 있었다.

“……그때 그 사기꾼 같은 AS 기사 놈은 맨날 부품 탓만 하더라고! 근데 우리 한 이사장님이 말이야, 딱 와서 보시더니 ‘민수야, 문제는 기계가 아니야. 바로 네 기름이야!’ 이러시는 거야. 기가 막히지 않수? 그리고 그 옆에는 똑똑한 AI 친구가 화면에다가 ‘기름의 산패’니 뭐니 하는 어려운 말들을 척척 띄워주는데, 내가 그날 아주 기절하는 줄 알았지 뭐야!”

강의실 여기저기서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과거 잘나가던 섬유 공장 사장이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밀려 모든 것을 잃었던 최영감님은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이야, 최 본부장님 말씀 들으니 나도 그때 그 심정 알겠소! 나도 우리 공장 염색기 때문에 속병 났을 때, 우리 이사장님이 와서 보시더니 ‘영감님, 문제는 기계가 아니라, 염색하는 물이라요!’ 하더구먼! 그 뒤로 우리 조합 교육생들이 와서 해결해주는데, 내가 이 나이에 다시 일할 맛이 나더이다!”

최민수의 강의는 기술 강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년배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응원이자, ‘나이 듦’이 결코 ‘뒤처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그들의 잃어버린 자부심을 되찾아주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의 얼굴에는 망해가는 치킨집을 운영할 때의 불안함 대신, 사람들과의 진실된 관계 속에서 얻는 진정한 행복이 묻어 나왔다.

최민수의 강의가 끝나자, 곧이어 박재혁이 이끄는 ‘협동조합 경영 아카데미’ 시간이 이어졌다. 박재혁은 칠판에 복잡한 ‘손익 분기점’ 그래프를 그리며, 자신의 과거 실패 사례들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여러분, 제가 평생을 사업한다고 설치면서, 뼈저리게 깨달은 게 딱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데이터도, 완벽한 시스템도 없다는 겁니다! 제가 제일 잘 안다고 자만하다가, 제 친구들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릴 뻔했죠. 저 박재혁은 여러분에게 실패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러 온 게 아닙니다. 실패했을 때, 어떻게 다시 일어서고, 어떻게 사람과의 신뢰를 회복하는지, 그 과정을 공유하러 왔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충만함이 가득했다. 그의 강의는 금융 지식보다는, 인간적인 성숙함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각, 조합의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이사장실. 한기성은 널찍한 창밖으로 활기 넘치는 조합의 풍경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는 더 이상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쥐고, 노트에 무언가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병은 이제, 그에게 새로운 집중력을 요구하는 훈련과도 같았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오하윤이 들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허브차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이제 단순히 뛰어난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기술과 사람을 잇고,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조합의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재였다. 그녀의 연구실에는, 전국의 유수 대학에서 그녀의 비전을 보고 모여든 젊고 총명한 인재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시니어 기술자들의 풍부한 현장 경험과 데이터에, 자신들의 최신 IT 기술을 결합하여,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밤낮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선배님, 잠시 쉬세요. 오늘 고용노동부에서 실사가 나왔는데, 이사장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오하윤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한기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받아 들었다.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난 2년간 이룩한 ‘기적’은, 더 이상 작은 담장을 넘어설 수 없는 규모가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이사장실 문이 다시 열리고, 깔끔한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들어섰다. 그의 등장은, 조합의 자유롭고 따뜻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갑고 날카로운 이질감을 풍겼다.

“안녕하십니까, 한기성 이사장님. 고용노동부 고용지원국 차민준 사무관입니다.” 차민준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마치 모든 것을 데이터로 분석하고 계산하는 컴퓨터의 눈빛 같았다. 그는 명문대 행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젊은 나이에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재였다. 그의 노트에는 ‘효율성’과 ‘성과’라는 단어가 빼곡했다.

“저희는 그동안 시니어 일자리 창출과 관련하여 수많은 정책을 시도했습니다만, 이사장님의 조합처럼 성공적인 사례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사장님의 조합은,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에 직면한 대한민국에, 가히 혁명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칭찬은 뼈가 있는 것이었다. 한기성은 말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희 고용노동부는, ‘시니어 기술 협동조합’ 모델을 ‘국가 표준 시니어 재취업 프로그램’으로 채택하고 싶습니다. 이 모델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더 많은 퇴직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이사장님의 노고와 철학에 경의를 표하며, 국가적인 지원과 막대한 예산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의 제안은 달콤했다. 그것은 ‘인생 2막 본부’가 꿈꾸던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룰 수 있는, 거대한 유혹이었다. 한기성의 친구들, 박재혁, 최민수, 이동진이라면 환호하며 당장 수락했을 제안이었다.

하지만 차민준의 다음 말이, 그 달콤한 제안의 이면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날을 드러냈다.

“물론, ‘국가 표준’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사장님의 조합은 현재, 이사장님의 뛰어난 ‘경험’과 ‘직관’, 그리고 네 분 이사님의 ‘우정’이라는 비계량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역량에 따라 성공 여부가 달라질 수 있는, ‘표준화’에 적합하지 않은 모델입니다.”

차민준은 태블릿 PC를 켜고,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띄웠다. 화면에는 복잡한 통계 자료와 그래프, 그리고 ‘시스템화’, ‘정량화’, ‘프로세스 재정립’ 같은 단어들이 가득했다.

“저희가 분석한 결과, 조합의 성공은 ‘AI 기반 기술 지원’이라는 핵심 프로세스와 ‘맞춤형 교육 시스템’이라는 두 가지 요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이사장님의 ‘철학’과 ‘감성’ 같은 비효율적인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이 핵심 프로세스만을 추출하여,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한 완벽한 ‘현역 재취업 매뉴얼’을 제작하고자 합니다. 마치… 자동차 정비 매뉴얼처럼, 누가 봐도 똑같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요. 이 매뉴얼을 전국의 모든 퇴직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자동차 정비 매뉴얼처럼.’ 그 말이 한기성의 심장을 차갑게 때렸다. 그는 평생을 기계와 매뉴얼을 다루며 살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기계는 매뉴얼대로 움직이지만, 인간은 결코 매뉴얼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차민준의 제안은, 그들의 모든 성공을 ‘데이터’와 ‘프로세스’라는 차가운 틀 안에 가두려는 시도였다. 그들의 ‘진심’과 ‘관계’, ‘자존심’과 ‘우정’, 그리고 수많은 좌절과 눈물이 만들어낸 ‘영혼’을, 불필요한 변수라며 삭제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예술 작품에서 색채와 감정을 지워버리고, 오직 숫자로만 된 설계도를 남기려는 것과 같았다.

한기성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사무관님.” 한기성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저희 조합이 성공한 진짜 이유는, 매뉴얼에 쓰여 있지 않습니다. 저희는 매뉴얼 밖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만들어낸 기적입니다.”

차민준은 미소 지었다. 그에게 한기성의 말은, 감성적인 노인의 비합리적인 고집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사장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국가 표준’은 다릅니다. 감성보다는 효율이, 개인의 경험보다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사장님의 철학이 위대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 국민에게 보급하려면, 모든 것이 정량화되고 표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하는, 불확실한 모델이 될 뿐입니다.”

그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다. 한기성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차민준의 말은, 그가 평생을 믿어왔던 ‘효율’과 ‘합리성’이라는 가치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감’은, 알 수 없는 경고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다.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마치 모든 수치가 정상인데도, 어디선가 미세한 소음이 들려오는 낡은 기계처럼.

그의 머릿속이 복잡한 그때, 탁자 위에서 떨리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몸 상태가, 그의 자신감을 좀먹고 있었다.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늙은이가, 과연 이 젊은 엘리트의 논리에 맞설 수 있을까.


차민준이 돌아간 후, 이사회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박재혁은 흥분과 함께 정부의 제안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건 최고의 기회야! 국가가 우리의 가치를 인정한 거라고!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면, 우리는 더 이상 돈 걱정 없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어! 왜 이걸 마다한다는 거야?”

그의 눈에는, 지난번 금융 사기 사건으로 잃었던 모든 것과, 흔들리는 조합의 재정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보였다. 그는 성공의 기회를 놓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하지만 최민수와 이동진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들 역시 돈 걱정 없는 노후의 유혹에 흔들렸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속에는, 그들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 그리고 한기성의 진심 어린 리더십이 만들어낸 기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재혁아. 솔직히 말해서, 매뉴얼 몇 장으로 우리가 해온 일이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만났던 그 할머니 사장님의 눈물, 젊은 최현우의 어깨에 지워졌던 그 짐, 그런 것들이 매뉴얼에 담길 수 있냐고.” 최민수의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함께, 그들이 힘들게 되찾은 ‘초심’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이동진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성공한 건, 남들이 다 버리고 간 기계, 남들이 다 외면한 사람들을 우리가 직접 찾아가서, 진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땀 흘려 함께 고생했기 때문이야. 그게 매뉴얼에 어떻게 들어가는데?”

네 친구는 처음으로 ‘사업의 방식’이 아닌, ‘삶의 철학’을 두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사무실의 공기는 무거웠고, 그들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패이기 시작했다.

한기성은 그 모든 논쟁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탁자 아래에서, 의지에 상관없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병약함 때문에, 친구들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을 자격이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강이준의 차가운 얼굴과, ‘데이터와 시스템만이 진리’라고 외치던 김태준의 오만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끝에는, 영혼을 잃어버린 채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로봇처럼 변해버린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떨리지 않았다. 그 안에는, 자신의 병약함을 뛰어넘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그의 단호한 선언에, 회의실 안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박재혁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기성아,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네 고집 때문에 우리 모두를 다시 나락으로 끌고 갈 작정이야?”

한기성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우리가 힘들게 쌓아 올린 이 ‘영혼’을, 표준화라는 이름으로 팔아넘길 수 없어. 우리가 만드는 것이, 단순히 ‘시니어 재취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현역’들의 새로운 ‘정의’라면, 그 정의는 결코 매뉴얼 안에 갇힐 수 없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활기 넘치는 조합원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영혼 없는 시스템이 될 수 없어.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기술을 만들었어. 그리고 그 기술은,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거야. 나는 우리 조합이, 매뉴얼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살아있는 매뉴얼’을 만드는 곳이 되기를 원해.”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어떤 외침보다도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정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철학’을 지키기 위한, 한기성이라는 늙은 현역의, 고독하고도 비장한 선언이었다.

친구들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 그리고 그의 고집에 대한 답답함.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한번 한기성이라는 이름이 가진 강철 같은 신뢰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결정은, 그들이 함께 쌓아 올린 성공의 정상에서, 새로운 형태의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균열은, 그들이 앞으로 마주하게 될, 더욱 거대하고 본질적인 싸움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제2화] 아버지의 논쟁

다음 날 아침, ‘인생 2막 본부’의 사무실 공기는 1년 전, 금융 사기 사건이 터졌던 그날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의 적은 외부의 사기꾼이라는 명확한 실체가 있었지만, 지금의 적은 그들 자신, 서로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신념’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었기 때문이다.

네 명의 친구들은 출근은 했지만,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 웃고 떠들며 커피를 마시던 원형 테이블은, 이제 아무도 앉지 않는 잊힌 섬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최민수는 애써 활기찬 척, 어젯밤에 들어온 긴급 수리 의뢰 서류를 들고 사무실을 서성였다. “이야, 이거 봐라. 안산 반월공단에서 연락 왔는데, 25년 된 프레스 기계 유압이 자꾸 빠진다고 SOS를 쳤네. 이런 건 우리 전문이잖아! 당장 출동해야지! 기성아, 이거….”

그는 습관처럼 한기성을 불렀지만, 이내 말을 멈췄다. 한기성은 창밖을 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최민수의 목소리는 허공에서 길을 잃고 흩어졌다. 그는 멋쩍게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들고 혼자 현장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이동진은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평소보다 더 집요하게 사무실 구석구석을 닦았다. 그는 마치 먼지를 닦아내듯, 이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을 닦아내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사무실의 냉기는 더욱 선명해질 뿐이었다. 그는 친구들이 평생의 우정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장이 차갑게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박재혁.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 틀어박혀,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어젯밤 차민준 사무관이 보내온 ‘국가 표준 시니어 재취업 프로그램 TF팀 구성안’이라는 공식 문서가 놓여 있었다. 문서에는 ‘민간 부문 최고 자문위원’이라는 직함 아래, 그의 이름 ‘박재혁’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한기성에게 가로막혔던 자신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달콤한 유혹이자 위험한 기회였다. 그는 한기성의 ‘철학’을 존중했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었다. 좋은 일도 결국은 돈과 시스템이 있어야 지속 가능하다는 것이, 평생을 사업가로 살아온 그의 신념이었다. ‘영혼’만으로 밥을 먹여줄 수는 없었다. 그는 한기성의 고집이, 모두를 다시 한번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감상적인 아집이라고 생각했다.

‘기성아, 네가 틀렸어. 내가 옳았다는 걸,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어.’ 그는 결심했다. 한기성을 설득할 수 없다면, 그를 제외하고서라도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했다. 그것만이,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날 오후, 박재혁은 한기성 몰래, 정부 과천청사로 향했다. 고용노동부의 차민준 사무관은, 최고급 호텔의 VIP를 맞이하듯 깍듯하게 그를 맞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박 이사님. 이사님의 결단 덕분에, 저희 프로젝트가 큰 동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차민준의 눈빛은 차가웠지만, 그의 말에는 박재혁의 자존심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영리함이 담겨 있었다.

“한기성 이사장님의 철학은… 물론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위대한 장인이실지는 몰라도, 거대한 시스템을 설계하는 경영자는 아니십니다. 그 역할은, 박 이사님 같은 분이 맡아주셔야 합니다. 이사님의 현실적인 감각과 경영 능력이야말로, 이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 핵심 열쇠입니다.”

박재혁은 차민준의 의도를 알면서도, 그 칭찬이 싫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한기성의 그늘에 가려진 2인자였다. 기술적인 문제는 언제나 한기성이 해결했고,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는 늘 그의 몫이었다. 박재혁 자신은 그저 돈 문제를 해결하고, 궂은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조력자로 비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인정해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몇 시간에 걸쳐, ‘국가 표준 매뉴얼’의 기본 골격에 대해 논의했다. 차민준이 제시한 초안은, 철저하게 데이터와 효율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1단계: AI 기반 적성 검사를 통한 퇴직자 유형 분류 (A~D 등급)] [2단계: 등급별 맞춤형 온라인 기술 교육 (영상 강의 시청)] [3단계: 가상현실(VR) 시뮬레이터를 이용한 실습 훈련] [4단계: 평가 시험 통과 후, 중앙 관제 시스템을 통해 인근 기업으로 파견]

그 어디에도, 한기성이 강조했던 ‘사람’과 ‘진심’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박재혁은 처음에는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곧, 이것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방식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좋습니다. 이 방향이 맞습니다. 개인의 감정이나 경험 같은 주관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오직 객관적인 데이터와 시스템으로만 평가하고 운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전국 어디서든 똑같은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예산 낭비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영 지식을 총동원하여, 차민준의 계획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한기성에게 자신의 방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것은 이제, 단순한 사업을 넘어, 그의 남은 인생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 되어 있었다.


한편, 최민수와 이동진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안산 반월공단의 낡은 프레스 공장으로 향했다. 25년 된 프레스 기계의 유압이 자꾸 빠져, 정밀한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의뢰 내용이었다. 현장에 도착하자,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공장장이 그들을 반겼다.

“아이고, 인생 2막 본부에서 오셨구먼요!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근데… 한 이사장님은 안 오셨습니까?” 공장장의 질문에, 최민수는 멋쩍게 웃으며 둘러댔다. “아, 저희 이사장님은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으셔서요. 이런 잔챙이(?) 문제는, 저희가 해결해야죠!”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지난 2년간, 모든 기술적인 판단은 한기성의 몫이었다. 그들은 한기성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충실한 병사였을 뿐, 스스로 전장을 지휘해 본 경험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은 문제의 프레스 기계 앞에 섰다. 최민수는 배운 대로, 스마트폰을 꺼내 기계의 작동 영상과 소음을 녹화했다. 그리고는 습관적으로 MyAISmarteasy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압 저하의 일반적인 원인은 1. 유압유 누출, 2. 펌프 내부 마모, 3. 릴리프 밸브 고장입니다. 먼저, 기계 외부에서 오일이 새는 곳이 없는지 육안으로 확인해 주십시오.]

두 사람은 한 시간 넘게 기계를 샅샅이 뒤졌지만, 기름 한 방울 새는 곳을 찾지 못했다. 다음 단계는 펌프와 밸브를 분해해서 내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5년 된 낡은 기계의 내부는, 그들이 교육받았던 최신 기계와는 구조부터 달랐다. 섣불리 분해했다가는, 멀쩡한 부품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민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공장장은 옆에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기성이 형님이 있었으면, 소리만 듣고도 바로 원인을 알았을 텐데….” 이동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최민수는 AI의 분석 결과 대신, 다른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계 옆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공장장에게 다가갔다. “사장님, 이 기계랑은 얼마나 함께 하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공장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 스무 살 때부터 이 공장에서 일했으니… 족히 40년은 넘었지. 저놈은 내가 과장 시절에, 독일에서 직접 들여온 놈이야. 내 청춘이 다 저놈 안에 녹아 있다고.”

최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장님 눈에는, 저놈이 요즘 어디가 제일 아파 보입니까? 의사한테 가도,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잖아요.”

그의 질문은, 기술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기계와 평생을 함께해 온 한 장인의 ‘경험’에 대한 존중이었다. 공장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 다른 건 다 예전이랑 똑같은데, 딱 하나. 기계가 멈출 때, 예전에는 ‘쿵’ 하고 묵직하게 멈췄는데, 요즘은 ‘킁~’ 하고, 뭐랄까… 김 빠지는 소리 같은 게 희미하게 들려. 내 귀가 이상한가….”

김 빠지는 소리. 그 말을 듣는 순간, 최민수의 머릿에서 한기성이 평소에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기계는 거짓말을 안 해. 아프면 아프다고, 반드시 신호를 보내지. 그걸 듣는 게 우리 일이야.’

그는 다시 프레스 기계로 다가가, AI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릴리프 밸브의 작동 소음에 집중해. 특히, 압력이 해제되는 순간의 소음 패턴을 과거 정상 데이터와 비교 분석해 줘.’

AI가 소음 데이터를 정밀 분석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화면에 두 개의 소음 파형 그래프가 나타났다. [분석 결과, 정상 작동 시의 압력 해제 소음(A)과 달리, 현재 소음(B)에서는 압력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못하고, 미세하게 잔류하는 패턴이 발견됩니다. 이는 밸브 내부에 미세한 이물질이 끼어, 밸브가 완전히 닫히지 않는 ‘간헐적 닫힘 불량’ 현상으로 추정됩니다.]

원인은 펌프의 마모나 오일 누출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이물질 하나가, 이 거대한 기계를 병들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민수와 이동진은 공장장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릴리프 밸브를 분해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쌀알의 반의반도 안 되는 작은 쇳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쇳조각을 제거하고 밸브를 재조립하자, 프레스 기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묵직하고 힘찬 유압 소리를 내며 완벽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공장장은 자신의 경험이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는 사실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이야, 정말 용하시구먼! 한 이사장님 없이도, 두 분이서 이렇게 해결해 내실 줄이야! 역시 ‘인생 2막’은 뭐가 달라도 달라!”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최민수와 이동진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들은 한기성 없이도 문제를 해결했다는 작은 자신감을 얻었지만, 동시에 그 해결의 과정이 철저히 한기성이 가르쳐준 ‘방식’이었음을 깨달았다. 기술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힘이었다.

이동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민수야.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재혁이는 정부랑 손잡고 ‘매뉴얼’을 만든다고 하고, 우리는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있어. 이러다, 우리 정말 갈라서게 되는 거 아닐까?”

최민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각, 한기성은 홀로 사무실에서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 자판을 힘겹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정부의 ‘표준화 매뉴얼’에 맞설, 자신만의 ‘살아있는 매뉴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깊은 고찰이자, ‘관계’에 대한 철학이었으며, ‘실패’를 존중하는 지혜였다. 그는 자신의 30년 경험과, 지난 2년간 조합을 운영하며 겪었던 수많은 성공과 실패의 사례들을,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엮어내고 있었다.

[1장: 기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라] [2장: 실패는 데이터가 아니라,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3장: AI는 답을 주는 자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파트너다]

그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그의 오른손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 손목을 꽉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써 내려갔다. 이것은 단순히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한, 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기록이었다.

그가 깊은 고뇌에 빠져 있던 그때, 오하윤이 조용히 그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존경과 함께 깊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선배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녀는 그의 떨리는 손을, 자신의 따뜻한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선배님의 그 위대한 생각들, 제가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기술’로 번역해 드릴게요. 선배님의 철학이, 그냥 글로만 남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될 수 있도록요.”

그녀의 제안에, 한기성의 지친 눈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의 싸움이,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며칠 후. 박재혁은 마침내, 조합의 모든 이사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차민준 사무관과 함께 완성한 ‘국가 표준 시니어 재취업 프로그램 최종안’을 발표했다. 그것은 완벽하고, 효율적이며, 지극히 합리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한기성이 오하윤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살아있는 매뉴얼’의 첫 번째 초고가 들려 있었다.

두 개의 다른 미래. 두 개의 다른 철학. 시스템과 영혼. 효율과 진심.

‘아버지들의 논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정면충돌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조합의 운명을 가를, 그리고 어쩌면 한 시대의 방향을 결정할, 그들의 선택의 시간이, 마침내 다가오고 있었다.


 

[제3화] 복제된 실패

한 달 후.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는 수많은 언론사와 정부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대한민국 고용 정책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국가 표준 시니어 재취업 지원 센터’, 통칭 ‘시범 조합 2호점’의 개소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행사장의 맨 앞줄에는,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차민준 사무관과, 그의 옆에서 ‘민간 부문 최고 자문위원’이라는 명패를 달고 앉은 박재혁이 있었다. 박재혁의 얼굴에는, 자신의 신념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자의 자신감과, 친구들과 등을 돌렸다는 씁쓸함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는 애써 개인적인 감정을 지우고,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성공에만 집중하려 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 고령화 시대의 어두운 터널을 밝힐 새로운 등대의 점등식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단상에 오른 차민준 사무관의 목소리는 젊고 힘이 넘쳤다. “이곳, 시범 조합 2호점은, 과거 일부 개인의 뛰어난 역량에 의존했던 불확실한 모델을 넘어, 철저한 데이터와 AI 기반의 표준화된 시스템을 통해, 전국의 모든 퇴직자분들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재기의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곳에는 더 이상 ‘감’이나 ‘경험’ 같은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객관적인 데이터와 검증된 프로세스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의 연설은, 간접적으로 한기성의 방식을 ‘불확실하고 주관적인 구시대의 유물’로 규정하는, 날카로운 선전포고였다. 박재혁은 박수를 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개소식이 끝나고, 내빈들은 최첨단 시설로 가득 찬 센터 내부를 둘러보았다. VR(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한 수리 시뮬레이션실, AI가 개인별 맞춤 교육 커리큘럼을 짜주는 스마트 강의실, 모든 교육생의 성과를 실시간으로 데이터화하는 중앙 관제 시스템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고, 효율적이며, 지극히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 시각,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인생 2막 본부’의 허름한 사무실. 한기성과 최민수, 이동진은 작은 TV 화면으로, 화려한 개소식 풍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옛 친구 박재혁이 차민준 사무관과 악수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저 자식, 아주 날개를 달았네, 날개를 달았어.” 최민수가 쓴 침을 삼키듯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어쩔 수 없는 서운함이 묻어 나왔다.

이동진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신의 낡은 공구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방식이 틀렸다고, 세상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기성은 그저, 화면 속에서 의기양양하게 떠드는 차민준의 젊은 얼굴을,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떨리는 오른손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로부터 2주 후. ‘시범 조합 2호점’의 첫 번째 실전 의뢰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첫 고객은, 경기도 포천에서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작은 가족 경영 섬유 공장이었다. 문제는 40년이 넘은, 이제는 박물관에 가야 할 법한 스위스제 구형 직조기(직물을 짜는 기계)였다.

“기계가… 기계가 자꾸 실을 끊어 먹어요.” 공장을 운영하는 60대 노부부와, 그들의 아들이 시범 조합에서 파견된 두 명의 ‘매뉴얼 기술자’ 앞에서 하소연했다. “AS를 불러도 부품이 없어서 못 고친다 하고, 새 기계는 수입해야 하는데 그럴 돈은 없고… 이 늙은이들한테는 자식 같은 기계인데, 이대로 고철로 버려야 하나 싶어 밤에 잠도 안 옵니다.”

남편의 말에, 아내 되는 박 여사가 옆에서 거들었다. “특히, 비 오려고 하거나, 습한 날에 유독 더 심해. 우리 시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늘 그러셨지. ‘이놈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하고 똑같아서 날씨를 탄다’고. 우리 말은 안 믿겠지만, 꼭 그래요.”

하지만, 시범 조합에서 파견된 두 명의 50대 기술자, 김진수와 이철호는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차민준이 만든 ‘표준화 매뉴얼 V1.0’이 성경처럼 박혀 있었다.

[매뉴얼 1-1항: 의뢰인의 주관적인 경험담(Anecdote)은 데이터 분석에 혼란을 줄 수 있으므로, 참고는 하되 의존하지 말 것.]

김진수가 태블릿 PC를 꺼내 들며,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사장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저희 표준화된 프로세스에 따라, AI 정밀 진단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은 직조기에 각종 센서를 부착하고, AI 진단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한 시간 후, AI의 진단 결과가 나왔다. [AI 진단 결과: 2번 텐션 롤러(실의 장력을 조절하는 롤러) 내부의 베어링 마모도가 87%로, 교체 기준치를 초과함. 이로 인해 롤러의 회전이 불규칙해져, 실에 과도한 장력이 가해지는 것이 절단 원인으로 추정됨.]

결과는 명확했다. [매뉴얼 3-2항: AI가 특정한 부품은, 의심하지 말고 즉시 교체할 것.]

“원인을 찾았습니다. 텐션 롤러 베어링 문제입니다. 저희가 가져온 신형 베어링으로 교체하면, 바로 해결될 겁니다.” 이철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박 여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근데… 습한 날씨랑은 상관이 없는 거요?” “네, 어머님. 데이터상으로는, 습도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건 아마… 기분 탓이셨을 겁니다.”

김진수의 차가운 대답에, 노부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술자들은 매뉴얼에 따라, 능숙하게 낡은 베어링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시험 가동을 했다. 거대한 직조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비단 패턴을 짜내기 시작했다. 실은 더 이상 끊어지지 않았다.

“보십시오. 완벽하게 수리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희 시스템의 힘입니다.” 김진수는 의기양양하게 수리 완료 보고서에 사인을 받고, 공장을 떠났다. 노부부는 고맙다고 인사는 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를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 그날은 새벽부터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섬유 공장의 전화벨이, 시범 조합 2호점의 사무실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를 받은 차민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다시… 다시 멈췄다고요? 더 심하게?”

차민준과 박재혁, 그리고 기술자 김진수와 이철호가 황급히 포천의 섬유 공장으로 달려갔다. 공장의 상황은 처참했다. 직조기는 완전히 멈춰 섰고, 기계 주변에는 수십 갈래의 끊어진 실들이 거미줄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박 여사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당신들이 기계를 고친 게 아니라, 아주 망쳐놓고 갔어! 어제저녁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밤새 기계가 미친 듯이 실을 끊어 먹다가, 새벽에는 아예 서버렸다고! 이게 무슨 시스템이야! 사람 말을 무시하더니, 꼴좋다!”

김진수와 이철호는 당황하여, 다시 AI 진단기를 물렸다. 하지만 AI는 똑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시스템 오류: 원인을 특정할 수 없음. 모든 부품 정상.]

차민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완벽한 시스템이, 현실의 문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첫 순간이었다. 그의 데이터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박재혁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멈춰 선 직조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만약 한기성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기성이라면, 분명 기계가 아니라, 저 울고 있는 박 여사의 손을 먼저 잡고,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뼈아픈 의심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소문은, 최민수의 정보망을 통해 순식간에 ‘인생 2막 본부’에 전해졌다. 최민수는 고소하다는 듯 웃었지만, 한기성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그는 경쟁자의 실패를 기뻐하는 대신, 한평생을 바친 기계 앞에서 절망하고 있을 어느 노부부의 마음을 먼저 헤아렸다.

그는 이동진을 불렀다. “동진아. 포천 섬유 공장 사장님 연락처 좀 알아봐 줘. 그리고 그분들께, 우리가 비공식적으로 한번 찾아뵙고 싶다고, 정중하게 말씀드려 줘. 물론, 돈은 받지 않을 거라고. 그냥… 같은 시대를 살아온 기술자로서, 마음이 쓰여서 그런다고.”

다음 날, 한기성은 최민수, 이동진과 함께 포천의 섬유 공장을 찾았다. 노부부는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자신들의 실패를 조롱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한기성의 진심 어린 눈빛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한기성은 AI 진단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박 여사가 내어준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며, 한 시간 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아버지로부터 이 기계를 물려받았던 이야기, 남편과 함께 이 기계로 삼 남매를 키워냈던 이야기, 그리고 기계가 언제 아파하고, 언제 기분 좋아했는지에 대한, 그 어떤 데이터에도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이야기를 다 들은 한기성은, 멈춰 선 직조기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의 떨리는 오른손을, 차가운 기계의 표면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마치 아픈 사람을 진찰하는 늙은 의사처럼.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MyAISmarteasy가 박 여사의 모든 증언과, 오늘의 습도, 그리고 기계의 40년 역사를 교차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30년 경험이, 그 데이터의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떴다. “사장님. 범인은… 베어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직조기의 가장 깊숙한 곳, 수십 개의 실이 한데 모이는 ‘헤들 프레임(Heddle Frame)’이라는 부품을 가리켰다. “바로 저놈입니다. 저 프레임을 지지하는, 저 작은 고무 부싱(Bushing)이 삭아서,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겁니다.”

그의 진단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무 부싱요? 그 작은 고무 조각 하나 때문에 이 큰 기계가 멈춘단 말입니까?” 공장장이 물었다.

“네. 평소에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박 여사님 말씀대로, 습도가 높아지면, 원사(실)가 공기 중의 수분을 머금어 아주 미세하게 무거워지고 뻣뻣해집니다. 이때, 낡은 고무 부싱이 그 미세한 무게 변화를 버티지 못하고, 프레임 전체에 미세한 진동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 진동이, 결국 실을 끊어버리는 거고요. 어제 시범 조합 기술자들이 새 베어링으로 교체하면서 롤러의 회전력이 더 강해졌으니, 진동은 오히려 더 심해졌을 겁니다. 그래서 기계가 완전히 멈춰 선 거고요.”

그의 설명은, 데이터와 경험,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가 완벽하게 결합된, 하나의 완결된 추리였다. 문제는 부품이 아니었다. ‘관계’의 문제였다. 습도와 실, 그리고 낡은 고무 부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복합적인 상호작용. 이것은 매뉴얼에 기록될 수 없는, 오직 현장만이 가르쳐주는 지혜였다.

해결책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한기성은 근처 철물점에서 천 원짜리 고무판을 사 와, 낡은 부싱의 크기에 맞게 직접 칼로 오려내고, 그것을 교체했다.

그리고, 시험 가동. 거대한 직조기는, 40년 전 처음 이곳에 설치되었던 그 날처럼, 힘차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다시 아름다운 비단을 짜내기 시작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실은 단 한 올도 끊어지지 않았다.

노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한기성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사장님….”


그날 밤, 차민준 사무관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시범 조합 2호점 실패 원인 분석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한기성이 찾아낸 진짜 원인과 해결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완벽한 시스템이, 고작 천 원짜리 고무 조각 하나와, 어느 노부부의 ‘기분 탓’이라고 무시했던 경험담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데이터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는, 저장되어 있던 한기성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기 너머로, 조금은 지쳤지만, 깊고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이사장님. 저, 차민준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그의 엘리트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는 마침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틀렸던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오만한 엘리트의 자신감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진정한 해답을 찾고 싶어 하는 한 젊은이의, 진솔한 고백만이 남아 있었다. 한기성은 수화기 너머로, 조용히 미소 지었다.

복제된 실패는, 새로운 배움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제4화] 영혼 없는 기술자들

‘시범 조합 2호점’의 첫 번째 실전 의뢰지는, 경기도 포천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위치한,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작은 가족 경영 섬유 공장이었다. 성공에 대한 조급함과, 한기성의 방식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에 가득 찬 차민준과 그의 팀에게, 40년 넘은 스위스제 구형 직조기는 마치 자신들의 우수성을 증명해 보일 완벽한 무대처럼 보였다.

공장에 도착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새겨진 60대 노부부와, 도시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한 30대 아들이었다. “어서 오시오. 정부에서 보냈다는 그 똑똑한 양반들이시구먼.” 공장장인 남편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함께, 수많은 AS 기사들에게 시달린 자의 깊은 불신이 섞여 있었다.

“기계가… 기계가 자꾸 실을 끊어 먹어요.” 아내 박 여사가 하소연했다. “AS를 불러도 부품이 없어서 못 고친다 하고, 새 기계는 수입해야 하는데 그럴 돈은 없고… 이 늙은이들한테는 자식 같은 기계인데, 이대로 고철로 버려야 하나 싶어 밤에 잠도 안 옵니다. 특히, 비 오려고 하거나, 습한 날에 유독 더 심해. 우리 시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늘 그러셨지. ‘이놈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하고 똑같아서 날씨를 탄다’고.”

하지만, ‘표준화 매뉴얼 V1.0’을 성경처럼 여기는 기술자 김진수와 이철호에게, 그녀의 말은 그저 비과학적인 푸념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매뉴얼에 따라, 의뢰인의 주관적인 경험담을 정중히 무시하고, 곧장 AI 정밀 진단에 착수했다.

수십 개의 센서가 직조기에 부착되고, 차민준이 직접 개발에 참여한 최첨단 진단 프로그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 후, 태블릿 화면에 명확한 진단 결과가 떠올랐다. [AI 진단 결과: 2번 텐션 롤러(실의 장력을 조절하는 롤러) 내부의 베어링 마모도가 87%로, 교체 기준치를 초과함. 이로 인해 롤러의 회전이 불규칙해져, 실에 과도한 장력이 가해지는 것이 절단 원인으로 추정됨.]

원인은 명확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원인을 찾았습니다. 텐션 롤러 베어링 문제입니다. 저희가 가져온 신형 베어링으로 교체하면, 바로 해결될 겁니다.” 김진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박 여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근데… 습한 날씨랑은 상관이 없는 거요?” “네, 어머님. 데이터상으로는, 습도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건 아마… 기분 탓이셨을 겁니다.” 이철호의 차가운 대답에, 노부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술자들은 매뉴얼에 따라, 능숙하고 신속하게 낡은 베어링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시험 가동. 거대한 직조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비단 패턴을 짜내기 시작했다. 실은 더 이상 끊어지지 않았다.

“보십시오. 완벽하게 수리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희 시스템의 힘입니다.” 차민준은 의기양양하게 수리 완료 보고서에 사인을 받고, 공장을 떠났다. 그의 마음속에는, 한기성의 ‘감’을 뛰어넘는 ‘시스템’의 승리를 확신하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틀 후. 그들의 완벽했던 시스템에, 첫 번째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날은 새벽부터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시범 조합 2호점의 사무실, 차민준의 책상 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박 여사의 다급하고 원망 섞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보시오! 당신들이 기계를 고친 게 아니라, 아주 망쳐놓고 갔어! 어제저녁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밤새 기계가 미친 듯이 실을 끊어 먹다가, 새벽에는 아예 서버렸다고! 이게 무슨 놈의 시스템이야! 사람 말을 무시하더니, 꼴좋다!”

차민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는 기술자들과 함께 황급히 포천의 섬유 공장으로 달려갔다. 공장의 상황은 처참했다. 직조기는 차갑게 멈춰 섰고, 기계 주변에는 수십 갈래의 끊어진 실들이 거미줄처럼 엉겨 붙어, 마치 기계의 비명처럼 보였다.

김진수와 이철호는 당황하여, 다시 AI 진단기를 물렸다. 그들은 더 많은 센서를 부착하고, 더 복잡한 알고리즘을 돌렸다. 하지만 AI는 똑같은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다. [시스템 오류: 원인을 특정할 수 없음. 모든 기계적 부품 정상.] [시스템 오류: 데이터를 통한 원인 분석 불가.]

그들의 완벽한 시스템은, 예측하지 못한 ‘습도’라는 아날로그적 변수와, ‘사람의 경험’이라는 데이터화 할 수 없는 가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자신들의 방식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다. 베어링을 다시 분해했다 조립하고,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고, 전력 시스템까지 점검했다. 하지만 기계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과정에서, 김진수와 이철호는 서로의 탓을 하며 격렬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이게 다 자네가 베어링을 잘못 조립해서 그런 거 아니야!” “뭐라고? 매뉴얼대로 정확히 했는데! 자네야말로 센서 값을 잘못 입력한 거겠지!”

그들의 갈등을 지켜보던 차민준은, 평생을 믿어온 ‘데이터’와 ‘시스템’에 대한 신념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시스템에 ‘영혼’이 없음을, 즉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결국, 며칠간의 사투 끝에, 노부부는 지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됐소. 이제 그만들 하시오. 당신들은 기술은 있을지 몰라도, 기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우리 아들 같은 저 기계를, 더 이상 당신들 손에 망가뜨리게 할 수는 없소. 그냥 돌아가시오.”

그것은, 차민준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겪는 완벽한 실패였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멈춰 선 직조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실패를 통해, 한기성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보이지 않는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는 ‘시범 조합 2호점 실패 원인 분석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지만,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그의 데이터는, 이 실패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르는 그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이사장님. 저, 차민준입니다.”


 

[제5화] 현역의 강의실

차민준의 전화는, ‘인생 2막 본부’에 새로운 형태의 파장을 일으켰다. 그것은 더 이상 외부의 도전이나 내부의 갈등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철학이 과연 다음 세대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전수’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시험대의 시작이었다.

한기성은 차민준의 진심 어린 가르침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값진 실패를 하셨군요. 실패를 인정하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현역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와 실패한 시범 조합원들을 ‘인생 2막 본부’의 ‘특별 교육 프로그램’에 정식으로 초대했다.

다음 날, 강의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한쪽에는 성공 신화의 주역인 ‘본부’의 베테랑 조합원들이, 다른 한쪽에는 시스템의 실패로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시범 조합’의 조합원들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성공한 자들의 여유와, 실패한 자들의 위축감. 두 개의 다른 공기가 강의실 안에서 불편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한기성은 그 벽을 허물기 위해,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다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우리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둘 겁니다. 대신, ‘현역’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배우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이것은 정답을 가르쳐주는 주입식 교육이 아닙니다. 각자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의 실패를 보듬으며, 함께 답을 찾아 나가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첫 번째 강의는, 기술 강의가 아니었다. 이동진이 진행하는, ‘의뢰인의 마음을 읽는 법’이라는 제목의 인문학 강좌였다. 이동진은 낡은 점퍼 차림으로, 어색하게 강단에 섰다. 그는 평생을 남 앞에 나서기보다, 묵묵히 뒤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왔던 사람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의 이야기는 그 어떤 웅변가의 연설보다도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실패했던 과거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사업에 실패하고, 빚더미에 앉아, 가족들 볼 면목이 없어 죽으려고까지 했던 이야기.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며, 술 취한 젊은이에게 멱살을 잡히고도, 자식들 학비 때문에 참아야만 했던 이야기. 돈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해야 했던 그 비참했던 날들에 대해.

“……여러분, 우리가 만나는 의뢰인들은, 단순히 기계가 고장 나서 우리를 부르는 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인생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는 겁니다. 그 낡은 기계는, 그분들의 청춘이고, 자부심이며, 가족을 먹여 살린 밥줄입니다. 우리가 포천에서 만났던 그 사장님 부부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렌치를 드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손을 잡고, ‘제가 그 마음 압니다. 얼마나 힘드셨습니까’라고, 진심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의 진솔한 고백에, 시범 조합원들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비슷한 아픔과 상실을 겪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술자 김진수는, IMF 때 잘나가던 공장이 하루아침에 부도나 길거리에 나앉았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남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다음 강의는 최민수의 ‘지역 사회와 친구가 되는 법’이었다. 그는 마치 시장 어귀의 약장수처럼, 구수하고 활기찬 입담으로 강의실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자자, 다들 주목! 기술만 좋다고 밥이 나옵니까, 떡이 나옵니까? 아니죠! 사람이 나와야 밥도 나오고 떡도 나오는 겁니다! 일 끝나고, 그냥 쌩하고 오지 마쇼! 그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국밥집이 어디인지, 사장님한테 꼭 물어봐. 그리고 다음 날, 그 국밥집에 가서 ‘어제 그 공장 사장님 소개로 왔습니다’ 하고 인사 한번 해봐. 그렇게,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돈 주고도 못 사는 우리의 ‘영업 자산’이 되는 거라고! 기술은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기술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는 이론 대신,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며 겪었던 생생한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까다롭기만 하던 고객과 막걸리잔을 기울이다 형님, 동생이 된 이야기, 수리비를 못 받게 되자 오히려 미안하다며 동네방네 소문을 내줘 더 큰 계약을 따낸 이야기 등. 그의 이야기는,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강의는, 굳게 닫혔던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박재혁이 맡았다. 그의 강의 제목은 ‘실패를 통해 배우는 법’이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뼈아픈 금융 사기 사건을, 단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에게 공유했다. 그는 자신의 오만함과 독선이, 어떻게 친구들과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는지를 처절하게 고백했다.

“저는 제가 가장 똑똑하다고 믿었습니다. 데이터를 맹신했고, 제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단 1%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여러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는 우리에게 가장 정직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최고의 스승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함은 두려워하십시오. 진정한 전문가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동료에게 기꺼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결코 ‘현역’이 될 수 없습니다. 함께일 때, 비로소 우리는 ‘현역’이 될 수 있습니다.”

차민준과 시범 조합원들은, 마치 신세계에 온 듯한 충격 속에서 그들의 강의를 들었다. 그들의 교육 과정에는, ‘효율’이나 ‘성과’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 자리에는 ‘공감’, ‘관계’, ‘겸손’, 그리고 ‘연대’라는, 그들이 잊고 살았던 가치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영혼 없는 기술자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텅 비었던 가슴에, 조금씩 따뜻한 영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교육 3일차. 이론 교육을 마친 그들에게, 두 번째 단계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오하윤과 MZ세대 연구원들이 준비한, ‘공감 능력 보조 AI’를 활용한 가상 시뮬레이션 훈련이었다.

“선배님들, 저희가 선배님들의 ‘진심’을 도울 수 있는 작은 도구를 만들어 봤어요.” 오하윤은 시범 조합원들에게, 이 새로운 AI를 이용해, 과거 자신들이 실패했던 포천 섬유 공장 노부부와의 대화를 가상으로 시뮬레이션해보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기술자 이철호가, 용기를 내어 시뮬레이션에 참여했다. VR 헤드셋을 쓰자, 그의 눈앞에는 포천 섬유 공장의 풍경과, 원망 가득한 눈빛의 가상 ‘박 여사’가 나타났다.

가상 박 여사: “습한 날에 유독 더 심해요. 우리 영감 말이, 이 기계는 날씨를 탄다니까!” 이철호는 순간 당황했지만, 배운 대로 대답하려 애썼다. 이철호: “아… 그러셨군요.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색했고, 말투는 딱딱했다. AI가 즉시 분석 결과를 화면에 띄웠다.

[감정 분석: ‘공감 시도’ 확인. 하지만 목소리 톤과 어휘 선택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진정성’ 35%로 측정. 상대방의 신뢰도 소폭 상승에 그침. 조언: ‘힘드셨겠습니다’ 같은 일반적인 표현보다, 상대방의 말을 반복하며 구체적으로 공감해 보세요. (예: ‘아, 날씨까지 타는 기계라니, 정말 사람처럼 속을 썩였겠네요.’)]

이철호는 AI의 조언에 따라, 몇 번이고 다시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그는 처음에는 AI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어색하고 자존심 상했지만, 반복할수록 자신의 대화 방식이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혹은 닫아버리는지를 객관적인 데이터로 확인하며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무뚝뚝했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단답형이었던 말투가 풍부해졌다.

다음은 김진수의 차례였다. 그는 평소에도 직설적이고 냉정한 말투로 유명했다. 가상 박 여사: “당신들이 기계를 고친 게 아니라, 아주 망쳐놓고 갔어!” 김진수는 예전 같았으면 “저희는 매뉴얼대로 했을 뿐입니다”라고 받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심호흡을 하고, 이동진의 강의를 떠올렸다.

김진수: “……사모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의 섣부른 판단이, 사모님의 평생이 담긴 이 소중한 기계를 더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저희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에는 기계가 아니라, 사모님의 말씀을 먼저 듣겠습니다.”

그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이는 순간, AI의 화면에 새로운 분석 결과가 떠올랐다. [감정 분석: ‘진솔한 사과’ 100%. 상대방의 ‘분노’ 수치 30% 감소, ‘신뢰’ 회복 가능성 65%로 상승.]

김진수는 자신의 진심이, 데이터로 증명되는 것을 보고는, 왠지 모를 뭉클함을 느꼈다. 차민준은 그 모든 과정을,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기술이 인간의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교육의 마지막 날. 한기성은 그들에게 단 하나의, 그리고 가장 어려운 과제를 내준다. “이제, 다시 포천으로 가십시오. 하지만 이번에는 기계를 고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그분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위로해 드리고, 용서를 구하고 오십시오. 기계는… 그 다음에 고쳐도 늦지 않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끝내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신다면, 그대로 돌아오셔도 좋습니다. 이것은 성공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 도전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과제입니다.”


 

[제6화] 첫 번째 기적

포천의 아침은 차가운 비로 시작되었다. 며칠 전, ‘시범 조합 2호점’의 매뉴얼 기술자들이 무참히 실패하고 돌아섰던 그 섬유 공장. 그 낡은 공장 앞에는 다시 한 대의 승합차가 멈춰 섰다. 이번에는 차민준 사무관과, 그의 옆자리에 앉은 김진수, 이철호의 얼굴에 과거의 오만함이나 초조함 대신, 비장한 결의와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옅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차가운 매뉴얼 대신, 한기성이 가르쳐준 ‘진심’과, 오하윤이 건네준 ‘공감 능력 보조 AI’가 들려 있었다.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멈춰 선 직조기와 그 주변에 엉켜 붙은 실타래들이 그들을 맞았다. 며칠 만에 다시 찾은 공장의 공기는 이전보다 훨씬 무겁고 스산했다. 그곳에는, 절망과 포기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공장장 노부부는 그들을 보자마자, 경계와 불신이 뒤섞인 눈빛으로 차갑게 쏘아보았다.

“다시들 왜 왔소? 고친다더니, 기계만 망가뜨려 놓고 가지 않았소! 이젠 우리 같은 늙은이들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소!”

박 여사의 목소리는 울분에 차 있었다. 그녀의 주름진 손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난번 그들의 차가운 태도와, 이어지는 기계의 완벽한 마비는 노부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제는 그들의 공장뿐 아니라, 마음마저 완전히 닫혀 버린 듯했다.

김진수와 이철호는 이 예상치 못한 냉대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기성이 가르쳐준 ‘의뢰인의 마음을 읽는 법’이라는 강의 내용이, 하얗게 지워진 화이트보드처럼 텅 비어 있었다.

바로 그때, 차민준이 나섰다. 그는 망설임 없이 노부부 앞에 다가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사모님. 저희가 지난번에 정말 큰 실수를 했습니다. 기계만 보고, 두 분의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두 분의 오랜 역사와, 이 공장에 담긴 모든 것을 저희가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했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그의 사과에는 그 어떤 변명도, 계산도 없었다. 오직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 노부부의 굳었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차가운 정부 관료가 아닌, 한 사람의 젊은 인간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진수와 이철호 역시 차민준의 뒤를 이어 고개를 숙였다. “저희의 오만함이 두 분께 깊은 상처를 드렸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노부부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공장 안에는, 끊어진 실처럼 팽팽한 침묵만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차민준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오하윤이 건네준 ‘공감 능력 보조 AI’를 실행시켰다. AI는 화면에 노부부의 표정을 분석하며, [‘경계’ 70%, ‘분노’ 60%, 하지만 그 이면에 ‘피로’ 85%, ‘절망’ 90%]라는 데이터를 띄워주었다.

한기성이 이어피스 너머로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무관님, 기계를 고치러 온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세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차민준은 한기성의 지시대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사모님. 오늘 저희는 기계를 고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저희의 실수로 두 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드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디… 그 상처에 대해, 저희에게 이야기해 주실 수 없을까요?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의 말은, 딱딱한 공장장의 마음을 녹이는 부드러운 물줄기 같았다. 노부부의 눈가에 다시 물기가 어렸다. 박 여사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기계 옆에 주저앉았다. 남편인 공장장 역시,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김진수와 이철호는 렌치를 들지 않았다. 차민준은 보고서 대신, 수첩을 꺼내 들었다. 세 명의 기술자는 두 시간 넘게, 노부부의 살아온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경청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낡은 직조기처럼,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애환의 역사였다.

시아버지로부터 이 공장을 물려받았던 이야기. 남편과 함께 이 낡은 기계로 삼 남매를 키워내고, 학비를 대며, 시집장가를 보냈던 수많은 밤들. 한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비단 공장으로 불리며, 명절마다 마을 잔치를 열었던 자랑스러웠던 과거.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밀려, 값싼 중국산에 밀려,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전쟁이 되어버린 지금의 현실까지.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공감 AI’는 꾸준히 그들에게 노부부의 감정 변화를 알려주었다. [‘과거 회상’ 시, ‘행복’ 70%, ‘자부심’ 80%. ‘현재’ 언급 시, ‘절망’ 90%, ‘체념’ 95%. 핵심 감정: ‘상실감’.]

노부부의 하소연은, 단순히 기계 고장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져가는 자신들의 청춘에 대한 애가(哀歌)였고, 지켜내지 못하는 가업에 대한 죄책감이었으며, 아들에게조차 외면당한 부모의 뼈아픈 슬픔이었다.

“……사실, 우리 아들놈이… 이 공장을 물려받기 싫다고 해서…. 자기는 서울 가서 번듯한 직장 다닌다고. 아버지는 저 낡은 기계만 붙들고 산다고, 답답하다는 듯이 그러더구먼. 우리가 이 기계를 고쳐서 뭘 하겠나, 그냥 우리 대에서 끝내야 하나, 그런 생각에 마음이 더 복잡했지….”

박 여사의 마지막 고백은,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때렸다. 노부부의 진짜 문제는, ‘세대 간의 단절’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낡은 직조기는 그저, 그 모든 아픔을 상징하는 오브제일 뿐이었다.

그날, 김진수와 이철호는 기계를 고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차민준과 함께, 노부부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연락조차 받지 않으려던 아들은, 차민준의 끈질긴 설득에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차민준은 아들에게, 부모님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이 낡은 기계와 공장이, 단순히 시대에 뒤떨어진 생산 설비가 아니라, 대한민국 섬유 산업의 위대한 ‘역사’이자, 그들의 가족을 지탱해 온 ‘영혼’임을, 젊은 세대의 언어로 설득하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정부의 청년 창업 지원 정책과, 전통 산업 계승 지원 프로그램을 연결하여, 그에게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선생님, 지금 부모님 공장의 기계들은 단순한 고철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쌓인 ‘데이터’이자, 대한민국 산업의 ‘헤리티지’입니다. 저희 정부는 이러한 전통 산업의 계승과 현대화를 위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이 공장은 단순한 직조 공장이 아니라, ‘전통과 기술이 융합된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경험과 선생님의 젊은 감각이 더해진다면, 이곳은 다시 한번 대한민국 섬유 산업의 새로운 심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진심은, 결국 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들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부모님의 땀과, 자신의 어린 시절 공장에서 맡았던 실 냄새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차갑게 외면했던 공장이, 실은 그 어떤 첨단 기업보다도 깊은 역사와 영혼을 가진 곳임을 깨달았다.

며칠 후, 아들은 공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낡은 직조기 앞에 섰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함 대신, 새로운 시작을 향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김진수와 이철호, 그리고 차민준이, 새로운 가족처럼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매뉴얼에 갇힌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세대 간의 단절을 잇는, 진정한 ‘현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노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


이제서야, 기계를 고칠 때였다. 김진수와 이철호는 자신들이 지난번 놓쳤던 ‘습도’라는 변수를, 공장장의 말과 AI의 분석을 통해 다시 떠올렸다. 그들은 멈춰 선 직조기 앞에 섰다. 이번에는 AI 진단기를 먼저 물리지 않았다. 대신,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처럼, 기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김진수가 릴리프 밸브를, 이철호가 헤들 프레임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한기성이 이전에 찾아냈던 그 작은 고무 부싱의 문제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문제는 부품이 아니었다. ‘관계’의 문제였다. 습도와 실, 그리고 낡은 고무 부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복합적인 상호작용. 이것은 매뉴얼에 기록될 수 없는, 오직 현장만이, 그리고 ‘마음을 듣는 기술’만이 가르쳐주는 지혜였다.

해결책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차민준이 근처 철물점에서 천 원짜리 고무판을 사 와, 낡은 부싱의 크기에 맞게 직접 칼로 오려내고, 그것을 교체했다. 그의 손에는 기름때가 묻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시험 가동. 거대한 직조기는, 40년 전 처음 이곳에 설치되었던 그 날처럼, 힘차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다시 아름다운 비단을 짜내기 시작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실은 단 한 올도 끊어지지 않았다.

노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김진수와 이철호, 그리고 차민준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사장님들… 우리 기계뿐만 아니라, 우리 아들 마음까지 고쳐주셨소….”

그들은 수리비를 받지 않았다. 대신, 노부부가 직접 만든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며, 공장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꿈을 함께 꾸었다.


그날 밤, 차민준 사무관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시범 조합 2호점 실패 원인 분석 보고서’를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노트북을 켜고, 새로운 제목의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현역의 정의’에 대한 중간 고찰: 시스템을 넘어, 영혼을 향하여]

그는 자신의 완벽했던 시스템이, 왜 실패했는지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한기성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처음으로 ‘데이터’가 아닌, ‘사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이제, 차가운 엘리트의 그것이 아니라, 진정한 해답을 찾아 나서는 구도자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밤새도록 보고서를 썼다. 그리고 그 보고서에는, 포천 섬유 공장에서 겪었던 모든 깨달음이,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담겨 있었다. 기술이 사람을 이해하고, 세대가 서로를 존중하며, 감성과 효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만의 새로운 철학이 담긴 보고서였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보고서를 들고 한기성에게 찾아갔다. “이사장님. 제가… 제가 이 보고서를 통해, 이사장님의 철학이, 단순히 ‘감성’이나 ‘경험’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증명 가능한, 이 시대를 위한 가장 강력한 ‘시스템’임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최종 평가회에서, 이사장님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제 손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오만한 엘리트의 자신감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정한 가치를 위해 싸우려는 한 젊은이의, 불꽃 같은 열정만이 남아 있었다.

한기성은 그의 보고서를 말없이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차민준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려 주었다.

그것은, ‘영혼 없는 기술자’들의 고뇌와 성찰이 만들어낸, 가장 빛나는 ‘첫 번째 기적’이었다. 이제, 그들은 함께, 그들의 철학을 세상에 증명할 마지막 무대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제6화] 첫 번째 기적

포천으로 향하는 승합차 안의 공기는, 며칠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전의 여정이 오만함과 조급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오늘의 여정은 겸손함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으로 채워져 있었다. 차민준과 김진수, 이철호는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더 이상 딱딱한 매뉴얼이 아닌, 한기성이 마지막에 쥐여준 따뜻한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김진수가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깼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자신이 없다. 우리가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분들이 우리를 만나주기는 할지….”

그는 평생을 기계와 데이터하고만 대화해 온 사람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에게 40년 된 직조기의 복잡한 회로도를 분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게 느껴졌다.

이철호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사과한다고 해서, 그분들의 상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멈춰버린 기계가 다시 돌아가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더 화를 돋우는 건 아닐까?”

그들의 불안함에, 차민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에 없던 차분함과 단단함이 깃들어 있었다. “두 분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의 사과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문전박대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기성 이사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공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 도전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과제라고. 우리는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저지른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가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시 ‘현역’으로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겁니다.”

그의 말에, 두 기술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젊은 엘리트 사무관이었던 차민준이, 이제는 자신들을 이끄는 진정한 ‘리더’로 성장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섬유 공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굳게 닫힌 철문이었다. 문에는 [임시 휴업]이라는, 비뚤어진 글씨로 쓰인 종이가 나붙어 있었다. 그들의 실패가, 한 가족의 생계를 완전히 멈춰 세운 것이다.

차민준은 망설이지 않고, 옆에 있는 노부부의 자택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 뒤에야, 문이 빼꼼히 열리고 박 여사의 지친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문 앞에 선 세 사람을 보고, 곧바로 문을 닫으려 했다.

“무슨 낯으로 또 찾아왔소! 당장 돌아가시오!”

바로 그 순간, 차민준이 닫히는 문틈으로, 자신이 들고 온 보자기를 밀어 넣었다. “사모님! 제발… 제발 5분만, 아니, 1분만이라도 저희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보자기 안에는, 그들이 ‘인생 2막 본부’에서 밤을 새워 만든 것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기술 보고서가 아니었다. 40년 된 스위스제 직조기의 ‘역사’를 담은, 한 권의 앨범이었다. 오하윤의 연구팀이, 낡은 신문 기사와 도서관 자료를 뒤져 찾아낸, 그 직조기가 처음 한국에 수입되었을 때의 기사. 그리고 노부부의 아들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젊은 시절의 공장장 부부가 기계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흑백 사진. 마지막 장에는, 그들의 손주들이 그린, ‘할아버지 할머니의 보물 1호, 무지개 실 만드는 기계’라는 제목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박 여사는 문틈으로 보이는 앨범을 보고, 순간 숨을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차민준이 문틈 너머로, 진심을 다해 외쳤다.

“저희는… 저희는 그동안 기계의 ‘나이’만 보았지, 기계의 ‘역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두 분의 청춘과, 가족의 행복이 담긴 그 위대한 역사를, 저희의 오만함으로 모욕했습니다. 저희를 용서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만, 저희가 두 분의 역사를 배우고, 진심으로 존경할 기회를 한번만 더 주십시오.”

한참의 침묵 끝에, 굳게 닫혔던 문이, 아주 천천히, 다시 열렸다.


그날, 세 명의 기술자는 렌치를 들지 않았다. 그들은 노부부의 작은 거실에 마주 앉아, 그들이 만든 앨범을 함께 보며, 몇 시간에 걸쳐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아, 노부부가 진짜로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난번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깨달았다.

그들의 진짜 문제는, 기계 고장도, 세대 간의 단절도 아니었다. 그것은,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요즘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것들은, 이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낡고 초라한 것이 되어버렸지. 저 기계도, 우리 공장도, 그리고 우리 부부도… 이제 곧 세상에서 잊혀 없어질 거라는 생각에, 밤에 잠이 안 와. 아들놈한테 화를 냈던 것도, 사실은…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는, 마지막 발버둥이었는지도 모르겠소.”

공장장의 마지막 고백은, 세 사람의 가슴을 깊이 울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려 했던 ‘표준화’와 ‘시스템화’가, 바로 이분들의 역사를 지워버리는, 얼마나 폭력적인 행위였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날, 김진수와 이철호는 기계를 고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노부부의 아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부모님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이 낡은 기계와 공장이, 단순히 돈을 버는 생산 설비가 아니라, 한 가족의 ‘역사’이자, 이 사회가 지켜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진심을 다해 설득했다.

그들의 진심은, 결국 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들은 지난 며칠간, 부모님 몰래 ‘인생 2막 본부’의 홈페이지와 관련 기사들을 모두 찾아보았다고 했다. 그는 한기성과 친구들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며칠 후, 아들은 공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낡은 직조기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시범 조합 2호점의 기술자들이, 새로운 가족처럼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매뉴얼에 갇힌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세대 간의 단절을 잇는, 진정한 ‘현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노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


이제서야, 기계를 고칠 때였다. 김진수와 이철호는 자신들이 지난번 놓쳤던 ‘습도’라는 변수를, 공장장의 말과 AI의 분석을 통해 다시 떠올렸다. 그들은 멈춰 선 직조기 앞에 섰다. 이번에는 AI 진단기를 먼저 물리지 않았다. 대신,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처럼, 기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김진수가 릴리프 밸브를, 이철호가 헤들 프레임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한기성이 이전에 찾아냈던 그 작은 고무 부싱의 문제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문제는 부품이 아니었다. ‘관계’의 문제였다. 습도와 실, 그리고 낡은 고무 부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복합적인 상호작용. 이것은 매뉴얼에 기록될 수 없는, 오직 현장만이, 그리고 ‘마음을 듣는 기술’만이 가르쳐주는 지혜였다.

해결책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차민준이 근처 철물점에서 천 원짜리 고무판을 사 와, 낡은 부싱의 크기에 맞게 직접 칼로 오려내고, 그것을 교체했다. 그의 손에는 기름때가 묻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시험 가동. 거대한 직조기는, 40년 전 처음 이곳에 설치되었던 그 날처럼, 힘차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다시 아름다운 비단을 짜내기 시작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실은 단 한 올도 끊어지지 않았다.

노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김진수와 이철호, 그리고 차민준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사장님들… 우리 기계뿐만 아니라, 우리 아들 마음까지 고쳐주셨소….”

그들은 수리비를 받지 않았다. 대신, 노부부가 직접 만든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며, 공장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꿈을 함께 꾸었다.


그날 밤, 차민준 사무관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시범 조합 2호점 실패 원인 분석 보고서’를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노트북을 켜고, 새로운 제목의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현역의 정의’에 대한 중간 고찰: 시스템을 넘어, 영혼을 향하여]

그는 자신의 완벽했던 시스템이, 왜 실패했는지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한기성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처음으로 ‘데이터’가 아닌, ‘사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이제, 차가운 엘리트의 그것이 아니라, 진정한 해답을 찾아 나서는 구도자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밤새도록 보고서를 썼다. 그리고 그 보고서에는, 포천 섬유 공장에서 겪었던 모든 깨달음이,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담겨 있었다. 기술이 사람을 이해하고, 세대가 서로를 존중하며, 감성과 효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만의 새로운 철학이 담긴 보고서였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보고서를 들고 한기성에게 찾아갔다. “이사장님. 제가… 제가 이 보고서를 통해, 이사장님의 철학이, 단순히 ‘감성’이나 ‘경험’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증명 가능한, 이 시대를 위한 가장 강력한 ‘시스템’임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최종 평가회에서, 이사장님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제 손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오만한 엘리트의 자신감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정한 가치를 위해 싸우려는 한 젊은이의, 불꽃 같은 열정만이 남아 있었다.

한기성은 그의 보고서를 말없이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차민준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려 주었다.

그것은, ‘영혼 없는 기술자’들의 고뇌와 성찰이 만들어낸, 가장 빛나는 ‘첫 번째 기적’이었다. 이제, 그들은 함께, 그들의 철학을 세상에 증명할 마지막 무대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제7화] 가장 위대한 프레젠테이션

포천 섬유 공장에서의 기적은, 단순한 성공 사례 하나를 추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생 2막 본부’와 ‘시범 조합 2호점’이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던 두 조직의 화학적 결합을 이끌어낸 촉매제였다. 차민준과 그의 팀원들은, 이제 한기성의 철학을 의심하는 외부인이 아니라, 그 철학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함께 싸우는 가장 헌신적인 ‘동지’가 되어 있었다.

정부의 최종 평가회 날짜는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프로젝트를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곳은, 대한민국 시니어 재취업 정책의 미래 방향을 결정하는, 거대한 분수령이 될 터였다. 한쪽에는 차민준이 초기에 설계했던 ‘데이터 기반 표준화 시스템’이, 다른 한쪽에는 한기성이 평생을 통해 증명해 온 ‘사람 중심의 철학’이 놓여 있었다.

‘인생 2막 본부’의 사무실은, 이제 거대한 선거 캠프처럼,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전쟁 상황실이 되었다. 차민준은 자신의 모든 행정 능력과 인맥을 총동원했다. 그는 더 이상 ‘실패 보고서’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한기성의 철학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모델인지를 증명해 낼 ‘승리의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단순히 감성에 호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심’이라는 것이, 결국은 가장 높은 ‘효율’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데이터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는 박재혁과 머리를 맞대고, 지난 2년간 ‘인생 2막 본부’가 해결했던 수백 건의 사례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객 만족도’, ‘재의뢰율’, ‘지역 사회 파급 효과’ 같은 비계량적인 가치들을, 설득력 있는 데이터와 그래프로 시각화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박재혁은 차민준의 날카로운 분석력과 시스템적 사고에 감탄했고, 차민준은 박재혁의 노련한 경영 감각과 현실적인 통찰력에 경의를 표했다. 두 명의 ‘경영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최고의 파트셔가 되어가고 있었다.

최민수와 이동진은, ‘살아있는 증거’들을 모으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최민수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조합의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의뢰인들을 찾아가,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영상으로 담아냈다. 그의 카메라 앞에서는, 낡은 기계 앞에서 절망하던 사장님들이, 이제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이동진은, 조합에 들어와 새로운 인생을 찾은 시니어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그는 경비원으로 일하며 느꼈던 자신의 설움과, 조합을 통해 되찾은 자존감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며, 다른 조합원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의 인터뷰는, ‘현역’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언이 되었다.

오하윤과 그녀의 젊은 연구원들은, 이 모든 아날로그적인 증거들을,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강력한 ‘디지털 콘텐츠’로 재창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최민수가 찍어온 투박한 영상을 한 편의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로 편집했고, 이동진의 인터뷰를 팟캐스트 시리즈로 만들었다. 그리고, ‘공감 능력 보조 AI’가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시연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마지막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기성은 조용한 미소로 지켜보며,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최종 평가회 당일, 그가 발표할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의 뜨거운 의지를 따라주지 못하고 있었다. 파킨슨병의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 그의 오른손 떨림은, 약을 먹어도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걸음걸이는 눈에 띄게 느려졌고, 밤에는 온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있음을, 친구들과 아내에게 끝까지 숨기려 애썼다. 그는 이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약한 모습이 팀의 사기를 꺾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쥐고, “나는 괜찮다. 나는 아직 현역이다”라고 되뇌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는 프레젠테이션 원고를 컴퓨터로 작성하는 대신, 떨리는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노트에 써 내려갔다. 그것은 단순히 발표문을 쓰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남은 생을 걸고,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마지막 메시지를 새기는, 처절한 의식이었다.

그의 노트에는, 기술이나 데이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그 자리에는, ‘존엄’, ‘관계’, ‘책임’, ‘계승’과 같은, 그가 평생을 통해 깨달은 삶의 가치들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들은 이제, 운명의 심판대 위에 오를 일만 남았다.


최종 평가회 당일. 정부 과천청사의 가장 큰 대회의실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고위 관료들과, 학계의 권위자들, 그리고 날카로운 눈의 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먼저 발표에 나선 것은, ‘표준화 시스템’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자원한 차민준 사무관이었다. 그는 더 이상 오만한 엘리트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진정한 해답을 찾아 나선 구도자였다.

“존경하는 위원님 여러분. 저는 오늘, 실패에 대한 보고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계했던 ‘AI 기반 표준화 매뉴얼 V1.0’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처절할 정도로 솔직하게 데이터로 증명했다. 그리고 그는, 포천 섬유 공장에서 자신이 목격했던 ‘기적’에 대해,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저는 그곳에서, 제 데이터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진심이, 시스템이 아니라 관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멈췄던 기계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설계했던 시스템에는, 바로 그 ‘영혼’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고백에, 회의장은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이제, 그 ‘영혼’이 무엇인지에 대해, 저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신 분을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인생 2막 본부’의 한기성 이사장님이십니다.”

모두의 박수 속에, 한기성이 천천히 연단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조금 불편해 보였지만, 그의 허리는 꼿꼿했고, 그의 눈빛은 그 누구보다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화면에 띄우지 않았다. 그는 데이터나 그래프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무대 위로, 사람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제 첫 번째 증인을 소개합니다.” 무대 위로, 1부에서 만났던 ‘백합 세탁소’의 강복순 할머니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올라왔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인생 2막 본부’가 어떻게 자신의 낡은 세탁기뿐만 아니라, 잊혔던 자존심까지 고쳐주었는지를 증언했다.

“제 두 번째 증인입니다.” 2부에서 만났던, 사기꾼 강이준의 덫에 걸렸던 젊은이, 최현우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이제 어엿한 ‘인생 2막 본부’의 청년 멘토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을 돕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담담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기성은 무대 위로, 포천 섬유 공장의 노부부와, 말쑥한 청년 사업가로 변신한 그들의 아들을 불렀다. 그들의 옆에는, 이제는 그들의 가장 든든한 동료가 된, ‘시범 조합 2호점’의 김진수와 이철호가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은 매뉴얼이 아닌, ‘사람을 통한 배움(멘토십)’을 통해 어떻게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가족’이 되었는지를, 환한 미소로 증언했다.

그들의 진심 어린 이야기는, 그 어떤 화려한 데이터나 그래프보다도 강력한 증거가 되어, 회의장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침내, 한기성은 자신의 마지막 프레젠테itioner을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존경하는 위원님 여러분. 현역의 정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이며,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따라서 현역을 키우는 매뉴얼은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유일한 매뉴얼은 바로, 먼저 길을 걸어간 ‘사람’ 그 자체입니다. 저희가 만들려는 것은 ‘표준화된 시스템’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 ‘진심’을 전수하는 ‘위대한 계승’입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회의장에서는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이어,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한 시대의 철학이, 다음 시대를 설득하는, 위대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제8화] 차민준의 고백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최종 평가회는 사실상 ‘인생 2막 본부’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평가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차민준이 초기에 제안했던 ‘표준화 매뉴얼’ 계획을 전면 폐기하고, 한기성의 ‘사람 중심 멘토십 모델’을 국가 시범 사업으로 채택하는 데 동의했다.

회의장을 나서는 한기성과 친구들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그들의 등 뒤로, 수많은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정부 고위 관료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을 벅차게 한 것은, 무대 위에서 함께 웃고 울었던 ‘살아있는 증인’들, 즉 그들이 진심으로 도왔던 사람들의 따뜻한 포옹이었다.

그날 저녁, ‘인생 2막 본부’에서는 조촐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축하 파티가 열렸다. 최민수는 자신의 치킨 가게에서 직접 튀겨 온 치킨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았고, 박재혁은 아껴두었던 최고급 와인을 꺼내 왔다. 이동진은 묵묵히, 모든 사람들의 잔을 채우며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파티의 주인공은 단연, 차민준이었다. 그는 더 이상 딱딱한 정장 차림의 정부 관료가 아니었다. 그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시니어 조합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값진 교훈으로 삼아 한 단계 더 성장한,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제가…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정부 관료로서가 아니라, 한기성 이사장님의 ‘첫 번째 제자’로서 섰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 모든 것을 데이터와 시스템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한 엘리트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경험’과 ‘지혜’를, 구시대의 낡은 유물쯤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오만함의 대가로,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는 한기성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사장님께서는, 그런 저를 책망하는 대신, 가장 따뜻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효율이 아니라 관계를,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먼저 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사장님의 프레젠테이션을 보며, 제가 만들려 했던 ‘매뉴얼’이 얼마나 차갑고 영혼 없는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다시, 조합원들과 친구들을 둘러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로 정부에 제안하려 합니다. ‘국가 표준 매뉴얼’ 제작 계획을, ‘살아있는 매뉴얼, 국가 멘토단’ 구축 사업으로 전면 수정할 것을 건의하겠습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저 차민준이, 그 위대한 프로젝트의 첫 번째 실무 책임자가 되어, 이사장님과 선배님들을 끝까지 모시고 싶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고백과 선언에, 사무실 안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한기성은 말없이, 그의 잔에 막걸리를 가득 채워주었다. 세대를 뛰어넘는 두 남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 안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이 담겨 있었다.


다음 날부터, ‘살아있는 매뉴얼’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한기성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이제 그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된 차민준과, 그의 철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 친구들, 그리고 새로운 기술로 그들의 꿈을 구현해 줄 오하윤과 젊은 연구원들이 함께했다.

그들의 첫 번째 작업은, ‘매뉴얼’이라는 단어 자체를 버리는 것이었다. “매뉴얼은 정답을 제시하지만, 우리의 교육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오하윤이 제안했다.

그들은 대신, ‘현역의 여정(The Journeyman’s Path)’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교육 커리큘럼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식을 주입하는 과정이 아니라, 멘토와 멘티가 함께 길을 걸으며,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가도록 돕는 ‘동반 성장 프로그램’이었다.

커리큘럼은 크게 세 단계로 구성되었다.

1단계: 마음 열기 (The Unlearning Process)

  • 기술 교육에 앞서, 이동진과 최민수가 주도하는 ‘관계 형성’ 워크숍이 진행된다. 교육생들은 2인 1조로 짝을 이뤄, 기술이 아닌, 서로의 살아온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는 법을 배운다.
  • ‘공감 능력 보조 AI’는 이 과정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얼마나 경청하는지, 얼마나 깊이 공감하는지를 데이터로 보여주며, 스스로의 소통 방식을 성찰하도록 돕는다.

2단계: 현장과 만나기 (The Real-World Lab)

  • 본격적인 기술 교육은, 강의실이 아닌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한기성과 베테랑 조합원들이 멘토가 되어, 교육생들과 함께 실제 의뢰 현장에 동행한다.
  • 교육생들은 단순히 기술을 배우는 것을 넘어, 멘토가 어떻게 의뢰인과 관계를 맺고, 어떻게 문제의 본질을 파고드는지를 바로 곁에서 보고 배운다.
  • MyAISmarteasy의 기술 진단 AI와 공감 보조 AI는, 이 현장 교육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보조 도구로 활용된다.

3단계: 실패하고 공유하기 (The Failure Conference)

  • 교육의 마지막은, 성공 사례가 아닌 ‘실패 사례’를 공유하는 컨퍼런스로 마무리된다. 박재혁이 주도하는 이 시간에는, 교육생들이 현장에서 겪었던 실수와 실패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동료들과 함께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토론한다.
  • 이 과정은, 실패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가장 값진 자산이라는 조합의 핵심 철학을 체득하게 한다.

이 혁신적인 교육 커리큘럼은, 차민준의 보고서를 통해 정부와 학계에 소개되었고, 전례 없는 찬사를 받았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직업 교육이 아니었다. 그것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기술과 공존하고, 어떻게 평생 학습하며 성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교육 철학의 제시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기성의 병세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과 동료들 앞에서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혼자가 되면, 멋대로 떨리는 손과 뻣뻣해지는 몸의 감각에, 깊은 무력감에 빠지곤 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이 위대한 프로젝트를 끝까지 이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마주해야 했다. 그의 ‘정의’를 완성하기 전에, 그의 ‘시간’이 먼저 끝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날 밤, 그는 홀로 자신의 서재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때 썼던 노트를 다시 펼쳐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마지막 꿈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떠난 후에도, ‘인생 2막 본부’의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하는, ‘위대한 계승’에 대한 계획이었다. 그의 마지막 싸움은, 이제 세상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9화] 지휘자의 마지막 악보

최종 평가회에서의 승리 이후, ‘인생 2막 본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고 활기찬 공간이 되었다. 차민준 사무관이 합류하면서, 정부와의 협력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들이 설계한 ‘현역의 여정’ 교육 프로그램은 전국적인 모델로 확산될 준비를 마쳤다. 박재혁은 밀려드는 투자 제안과 파트너십 요청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고, 최민수와 이동진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교육생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하루가 짧았다.

모두가 희망과 성공의 열매를 맛보며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 이 모든 기적의 시작점이었던 한기성만이, 조용히 자신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의 몸은, 더 이상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파킨슨병의 진행은 생각보다 빨랐다. 아침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거대한 산을 넘는 것처럼 느껴졌고,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는 단순한 행위조차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고된 노동이 되었다. 그의 오른손 떨림은 이제 약물로도 완전히 제어되지 않았고, 그의 걸음걸이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땅에 끌리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숨겼다. 친구들과 동료들 앞에서는 애써 꼿꼿하게 허리를 폈고, 떨리는 손은 늘 점퍼 주머니 속에 감추었다. 그는 이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에,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모두의 정신적 지주이자, 흔들리지 않는 ‘이사장’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병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사람이 아닌 그의 파트셔, MyAISmarteasy였다. 그가 사용하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에는, 그의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다. AI는 그의 미세한 손 떨림의 주기와 진폭, 걸음걸이의 보폭 변화, 그리고 밤사이의 수면 패턴까지, 그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모든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홀로 사무실에 남아 ‘현역의 여정’ 교육 자료를 검토하던 그의 태블릿 화면에, 낯선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의료 경고: 사용자 ‘한기성’님의 최근 1개월간 운동 능력 데이터 분석 결과, 파킨슨병 증세가 이전 대비 28%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현재의 업무 강도는 뇌세포의 손상을 가속화시킬 수 있으니, 즉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전문의와 상담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한기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경고 창을 닫아버렸다. “이 똑똑한 녀석… 나보다 내 몸을 더 잘 아는군.”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이제, ‘현역’으로 살아가는 법이 아니라, ‘현역’으로서 존엄하게 마무리하는 법을 준비해야 했다.


그날 이후, 한기성은 자신의 마지막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것은, 그가 떠난 후에도, ‘인생 2막 본부’의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하는, ‘위대한 계승’에 대한 계획이었다.

그는 오하윤을 자신의 사무실로 조용히 불렀다. “하윤 씨.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그는 처음으로, 오하윤에게 자신의 병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오하윤은 그의 떨리는 손을 붙잡고,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녀에게 한기성은 단순한 상사를 넘어,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울지 마.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어.” 한기성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마지막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이 녀석 안에 남기고 싶어.” 그가 가리킨 것은, MyAISmarteasy였다.

“나의 30년 기술자로서의 경험, 지난 3년간 조합을 이끌며 겪었던 모든 성공과 실패의 순간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현역의 정의’에 대한 모든 철학을, 하나의 ‘디지털 영혼(Digital Soul)’으로 만들어 줘. 내가 없어진 후에도, 후배들이 이 AI를 통해, 마치 나와 직접 대화하는 것처럼 배우고, 질문하고,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나의 ‘살아있는 매뉴얼’을, 영원히 살아 숨 쉬는 AI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야.”

그것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오하윤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것이, 자신을 믿어준 위대한 스승에게 바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최고의 헌사임을 알고 있었다.


그날부터,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인수인계’가 시작되었다. 한기성은 매일 밤, 오하윤의 연구실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AI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는 수십 년간 겪었던 수천 건의 고장 사례들을,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AI에게 구술했다. “그때 말이야, 88년도 겨울이었는데, 영하 20도로 떨어진 날이었지. 공장의 모든 기계가 얼어붙었는데, 유독 3호 프레스만 멀쩡했어. 왜 그랬는지 알아? 그 기계를 담당하던 김 반장이, 자기 아들 덮어주던 낡은 군용 담요를, 밤새 그 기계 위에 덮어줬기 때문이야. 데이터로는 설명이 안 되지? 하지만 기계도 알아. 누가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술 정보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기계와의 교감이 담겨 있었다. 오하윤과 젊은 연구원들은, 그의 이야기를 데이터로 변환하는 동시에, 한 편의 위대한 서사시를 기록하고 있다는 경외감에 휩싸였다.

AI는 그의 목소리 톤, 말투, 자주 사용하는 비유, 심지어 그의 철학까지 학습하기 시작했다. AI는 이제 단순히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한기성처럼 ‘생각’하고, 한기성처럼 ‘판단’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 과정은, 한기성에게는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성공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실패와 과오까지도 모두 AI에게 고백해야 했다. 박재혁을 믿지 못했던 순간,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말들, 그리고 자신의 병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졌던 순간들까지.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마치 마지막 고해성사처럼, AI라는 거울 앞에 남김없이 비춰 보이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지만, 그의 정신은 오히려 더 맑고 투명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현역의 여정’ 1기 교육생들의 수료식이 다가왔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수료식을 며칠 앞두고, 한기성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는 이제 혼자서는 걷기조차 힘든 상태가 되었다.

친구들은 그의 수료식 참석을 극구 만류했다. “기성아, 안 돼! 네 몸부터 챙겨야지! 수료식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

하지만 한기성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니. 가야 해. 내가 직접… 내 제자들의 졸업을 축하해주고, 마지막 당부를 해야 해.”

수료식 당일. 한기성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강의실로 들어섰다. 그의 쇠약해진 모습을 본 모든 조합원들은, 충격과 슬픔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의 위대한 영웅이,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한기성은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강단에 섰다. 그는 준비해 온 원고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마지막 강의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의 동료들, 그리고 나의 제자들. 오늘… 여러분은 모두, 자랑스러운 ‘현역’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현역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여러분을 시험하고, 넘어뜨리려 할 겁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마다… 이것 하나만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곁에는, 우리의 아픔에 함께 울어주고, 우리의 기쁨에 함께 웃어줄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그의 목소리가 점점 힘없이 잠겨 들어갔다. 그가 결국, 연단 위에서 쓰러지려던 바로 그 순간.

강의실의 대형 스크린이, 갑자기 환하게 켜졌다. 그리고 그 화면에는, 익숙하지만 어딘가 다른, 한기성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은, 오하윤이 그의 모든 것을 담아 만들어낸, ‘디지털 영혼’, AI 한기성이었다.

AI 한기성은, 실제 한기성의 깊고 따뜻한 목소리로, 그의 마지막 강의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저를 찾아주십시오. 저는 비록 여러분 곁을 떠나지만, 저의 모든 지혜와 경험은, 이 녀석 안에 영원히 살아 숨 쉬며,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역’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여정에, 제가 가장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강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죽음을 예고하는 슬픈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정신이 영원히 살아 숨 쉬게 될, 위대한 탄생의 순간이기도 했다.

한기성은 자신의 분신이 대신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를 들으며, 친구들의 품에 안겨,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마지막 악보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마침내 전설이 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제10화 / 최종화] 현역의 정의

한기성의 마지막 강의는, 전설이 되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낸 ‘디지털 영혼’, AI 한기성의 등장은, 단순히 기술적인 놀라움을 넘어, 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유산을 남길 수 있는지에 대한,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증명이었다.

그의 병세는 깊어졌지만, 그는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육체가 낡은 기계처럼 멈춰가고 있음을 받아들였지만, 그의 정신과 철학은 이제 AI라는 새로운 그릇 안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게 될 터였다.

수료식이 끝난 후, ‘인생 2막 본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한기성은 공식적으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나, ‘명예 이사장’이자 ‘영원한 멘토’가 되었다. 그의 빈자리는, 이사회의 만장일치 추대로, 차민준과 오하윤이 공동 대표를 맡게 되었다. 이성과 감성, 시스템과 영혼, 그리고 시니어 세대의 지혜와 MZ 세대의 기술력이 완벽하게 결합된, 이상적인 리더십의 탄생이었다.

박재혁, 최민수, 이동진은 2선으로 물러나, 자신들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 ‘상임 멘토단’의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더 이상 회사의 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조합의 가장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년 후, 봄. ‘인생 2막 본부’는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적 혁신 모델로 성장해 있었다. 그들의 ‘현역의 여정’ 교육 프로그램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수천 명의 퇴직자들이 이곳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

그리고 오늘, 조합의 대강당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제1회 아시아 시니어-주니어 기술 포럼’. 한국을 넘어,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 비슷한 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전문가들과 젊은 혁신가들이, 그들의 성공 모델을 배우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포럼의 마지막 기조연설은, 공동 대표가 된 차민준과 오하윤이 맡았다. 차민준은 무대에 올라, 지난 1년간 ‘현역의 여정’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놀라운 성과를 ‘데이터’로 증명했다. “……저희 모델을 도입한 후, 대한민국의 50대 이상 재취업률은 17% 상승했으며, 시니어 세대의 디지털 정보 격차는 32%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대 간의 갈등 지수는,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자리를 창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음으로, 오하윤이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데이터 대신, ‘사람’의 이야기를 했다. “이 모든 숫자의 뒤에는, 한 분 한 분의 눈물과 웃음이 담겨 있습니다. 저희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와 함께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 모든 기적의 시작이었던 한 사람을 소개했다. “이제, 저희의 영원한 멘토이자, 이 모든 것의 살아있는 정의이신 분을,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한기성 명예 이사장님이십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한기성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의 몸은 눈에 띄게 쇠약해져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평온했다.

그는 마이크 앞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술이나 성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을 바쳐 찾아낸, ‘현역의 정의’에 대한, 마지막 고백이자 유언이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동료, 후배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께 ‘현역’이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제가 찾은 답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평생을 기계와 함께 살았습니다. 기계는 정직합니다. 낡으면… 멈춥니다. 저 역시… 이제 낡은 기계처럼, 멈출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계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을, 저는 이제 알기 때문입니다.”

“기계는 멈추면, 그저 고철이 되지만, 사람은 멈추는 순간, ‘유산’을 남깁니다. 제가 평생을 통해 얻은 지혜와 경험, 제가 겪었던 모든 실패와 성공의 기억들은, 제 육체가 사라져도, 저의 동료들과, 저의 제자들과, 그리고 저의 똑똑한 AI 파트너를 통해, 이 세상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찾은 현역의 첫 번째 정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음 세대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용기’입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객석에 앉아 있는 젊은 청년들과, 자신의 친구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 정의는,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를 얻었을 때의 기쁨도 크지만,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다음 세대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그들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를 늙지 않게 하는, 영원한 청춘의 샘물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역의 세 번째 정의는, ‘혼자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어깨에 기대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함께 길을 걸을 때, 우리는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친구들과, 객석의 오하윤과 차민준, 그리고 모든 조합원들을 둘러보았다.

“저는… 이제 곧 멈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제 곁에 가장 훌륭한 ‘동료’들이 함께하고 있기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현역입니다.”

“부디…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현역의 정의’를 찾아,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장내에는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이어, 국적과 세대를 넘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한 시대를 살아온 늙은 기술자에게 보내는, 최고의 존경과 찬사였다.


그날 저녁. 포럼이 끝나고, 조합의 옥상 정원에는 한기성과 그의 오랜 친구들만이 남아 있었다. 네 사람은 말없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많은 불빛들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박재혁이 먼저, 침묵을 깼다. “기성아. 멋진 연설이었다. 네 덕분에, 나도 내 ‘현역의 정의’를 찾은 것 같아.”

최민수와 이동진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기성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호흡은 조금 가빴지만,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가 마지막으로 AI에게 던졌던 질문을,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새로운 과제를 제안하시겠습니까?]

“……나는 이제, 이 버튼을 누를 힘이 없구나.” 한기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리고 우리의 후배들은, 앞으로도 수많은 새로운 과제들을 만나게 되겠지. 그때마다, 혼자 끙끙대지 말고, 서로에게 묻고, 함께 답을 찾아가. 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남기는 마지막 부탁이다.”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박재혁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기성의 ‘디지털 영혼’이자, ‘인생 2막 본부’의 심장이었다. 그의 모든 것이 담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었다.

박재혁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받아 들었다. 바로 그때, 스마트폰 화면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그것은 AI 한기성이, 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메시지였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 나의 육체는 멈추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저의 뒤를 이어, 새로운 시대의 청사진을 그려주십시오. 저는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겠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그들의 우정은, 이제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원한 것이 되었다.


몇 달 후. 조합의 작은 추모 공원. 한기성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비석 앞에, 그의 친구들과, 오하윤과 차민준, 그리고 수많은 조합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의 기일이었다.

그의 비석에는, 그가 평생을 통해 찾아낸 답이, 간결하게 새겨져 있었다.

[故 한기성. 그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현역(現役)이었다.]

추모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한기성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그들이 만들어가는 모든 현장 속에서, 그들의 모든 결정 속에서, 그들의 가슴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박재혁과 최민수, 이동진, 그리고 오하윤과 차민준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각자의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고, 그 화면 속에서는, 한기성의 따뜻한 미소를 닮은 AI가, 새로운 시대의 과제들을 제시하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끝났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현역의 정의’는, 이제 막 새로운 세대에게서,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About the Author
(주)뉴테크프라임 대표 김현남입니다. 저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하시는 분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www.umlcert.com/kimhn/

Leave a Reply

*